11월에 장미조팝나무에 꽃 한 송이가 피었다. 봄꽃이 입동도 지난 지금 왜 피었을까? 10월에 피는 개나리와 민들레도 있던데 뭘, 이 정도는 놀랄 일이 아닌가, 별 일도 아닌가. 그래도 희한하긴 희한하다. 지난봄에 가지 하나에 옹기종기 다닥다닥 피었더랬다. 우리 집 장미조팝나무는 마치 지팡이 하나를 꽂아둔 모양새였는데, 새하얀 장미로 지팡이를 둘러싼 것처럼 보였다. 조금 양념을 치자면 꽃으로 예쁘게 장식한 공연장 스탠딩 마이크 같았다. 무리 지어 핀 꽃이 참 예뻤다. 역시 꽃은 동시에 무리 지어 많이 피어야 이쁘구나. 오~~~ 괴성 비슷한 소리를 내며 사진을 찍은 것 같은데 못 찾겠다. 보여주고 싶은데 보여줄 수가 없어 안타깝다.
꽃이 지고 하나둘 가지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팡이 모양은 아니다. 우리가 나무를 그릴 때 흔히 그리는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며칠 전에 꽃 한 송이가 덜컥 피었다. 손톱 크기만 해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이 꽃은 지난봄에 못다 피어 이제야 피는 걸까? 아니면 내년 봄까지 기다리기 싫었나? 아니면 이제야 꽃을 피울 때가 되었나?
나 때는 말이다. ‘때‘라는 게 중요했다. 때 되면 학교 입학하고, 졸업하고, 취업하고, 나이 차면 결혼하고, 너무 늦기 전에 애 낳아 키우고 등등. 때를 놓치면 다음이 힘들었다. 입사 지원 자격에 나이 제한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울 엄마는 내가 서른까지 결혼하지 않거나 못해서, 사람 노릇 못할까 전전긍긍하셨다. 그래서 우리 또래들은 삶의 주기가 대개 비슷하다. 가끔 컨테이어 벨트에 올려져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이 흘러가는 것 같아 반발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무리 속에 있으니 편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개개인마다 '때'가 다르다. 입학은 같이 해도 졸업은 제각각이더라. 결혼하는 시기도 자신의 상황에 맞춰 다양하다. 나이 서른을 결혼의 마지노선으로 정해놓고는 때를 놓치면 큰일 날 것처럼 안달복달했던 나 때와 달리 요즘 어른들의 반응은 이렇다. “결혼? 본인이 때 되면 하겠지, 뭐. 안 해도 상관없고.” 출발선도 목적지도 다르다. 설령 목적지가 같아도 나아가는 시간은 자신의 페이스대로 한다.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인생 루틴과 타임 라인이 희미해지고 있다. 무리 속에서 편했던 나와 달리 불안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게 맞다.
11월에 핀 장미조팝. 가을에 피었다고 홀로 피었다고 덜 예쁘지 않다. 참 예쁘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늦거나 빠른 것이 아니라 모두 '때'가 다른 거다. 산다는 거 , 각자의 '때'에 맞춰 사는 거다. 그런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