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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눈 깜짝할 사이’가 쌓이고 쌓여

호모라 히로시 글 사카이 고마코 그림 <눈 깜짝할 사이>를 읽고

by 송알송알
호모라 히로시 글 사카이 고마코 그림 엄혜숙 옮김

나비가 꽃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가는 찰나의 순간 - 사뿐


12시를 알리기 위해 뻐꾸기가 문 열고 나올 때까지 초침이 움직이는데 걸린 매우 짧은 시간 - 째깍


고양이가 장난감 쥐를 발견하고 손으로 잡고 입으로 물기까지 순식간 - 앗


홍차에 빠트린 설탕이 녹으려면 필요한 아주 짧은 시간 - 퐁

사뿐

글이 거의 없다. 작품에 나오는 글자는 ‘사뿐, 째깍, 앗, 퐁, 갈래머리 소녀’가 전부다. 그림은 글자당 3장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뿐’은 꽃 위에 앉아 있는 나비 그림 2장이 연속으로 나오고 마지막 그림에서는 나비가 꽃 위로 날아가는 모습이다. 꿀을 충분히 먹었는지, 꽃 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는지는 모르겠다. 앞에 나오는 2장의 그림은 동일한 듯 아닌 듯하다. 정황상 아주 미세한 변화가 있어야 하고 , 있을 것 같은데 좀체 찾기 힘들다. 나비의 ‘사뿐’, 시계의 ‘째깍’, 고양이의 ‘앗’, 홍차와 설탕의 ’퐁‘은 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글자가 별로 없어 유아용 그림책으로 구분된 작품이다. 아이들에게 ’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작품인가? 뭘까? 홍차에 설탕이 다 녹으려면 눈을 두 번은 더 깜짝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헉.


갈래 머리 여자아이

갈래머리 여자아이가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할머니다. 마지막 그림은 순식간에 내 지나간 날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지금의 내가 되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가고 있다. 하루는 길지만 일주일은 짧고 한 달은 순식간에 일 년은 금방이다. 잠깐 이런 생각을 했다. 찰나의 인생, 눈 깜짝할 시간밖에 되지 않는 인생에서 내가 여전히 미완인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겠구나 싶다. 이것은 이 나이가 되도록 뭐 했나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어 괴로운 나에게 보내는 위로다.


눈 깜짝할 사이,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은 생각은 나이 든 내 모습을 바라볼 때만 드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드라마는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끝난다. 이때 드라마 방영시간이 찰나다. 꽃밭의 풀을 뽑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를 때가 있다. 대개는 언제 다 뽑나 싶어 툴툴거리지만 말이다. 남편과 대화에 몰두하느라 할 일을 잊기도 한다. 어릴 때는 밤새워 일하거나 공부하다가 만난 창밖의 여명에 뿌듯해한 적도 있다. ‘벌써 아침이야? 시간이 참 빠르구나.’ 그림이 좋아 그림 그리기를 할 때도 그랬다. 나뭇잎 한 장만 달랑 그렸을 뿐인데 무려 2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나뭇잎 그림은 초등학생 솜씨 같다는 말을 들었지만 재미있었다. 수많은 ‘눈 깜짝할 사이’가 떠오른다. 아, 그렇구나. 그런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할머니가 된 갈래머리 여자아이를 다시 본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라 그런가, 처음에는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상실감이 먼저 떠올랐다. 이제는 할머니를 만든 수많은 ’ 눈 깜짝할 사이‘를 생각한다. 그런 순간순간이 쌓여서 된 할머니의 삶은 분명 찬란하리라. 내 삶도 그렇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많은 ‘눈 깜짝할 사이’를 만들어내리라. 그래야지. 암만 그래야 하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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