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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알송알 May 01. 2022

어깨를 빌려 주는 마음 덕분에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고


1920년생 삼천

1939년생 삼천의 딸 박영옥

1959년생 박영옥의 딸 길미선

지금 32살인 길미선의 딸 이지연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 지금까지 100년 동안  4대에 걸친 여인들의 이야기는 읽지 않아도 알 것 같고 눈물부터 난다. 일제 강점기  어느 마을에 병든 어머니가 유일한 가족인 어린 여자애가 있다. 백정의 딸이라 꼼짝없이 위안부로 끌려갈 상황이다. 천주교에서 배운 사랑을 실천하고픈 도련님이 있다. 도련님과 여자애는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다. 사랑만 있으면 뭐든지 할 것 같지만 도련님들은 대개 그렇듯이 집을 떠나면 나약하다. 게다가 그는 평생을 “내가 너를 살렸다’는 유세를 떤다. 이건 증조할머니 삼천의 이야기다.


삼천과 도련님은 애를 낳고 키우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전쟁이 나서 남으로 피난을 떠났고 전쟁이 끝난 후 피난민들이 모여사는 곳에 정착한다.  혼기가 찬 딸아이를 치워버리듯 시집보냈는데  알고 보니 남자는 이미 북에서 한 번 결혼했던 사람이다. 재혼이면 그나마 다행이게? 남자의 부인과 아이들이 찾아오고 남자는 조강지처 운운하며 전가족들에게 가버린다. 자신의 딸을 호적에 올렸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고 생색을 한껏 낸다. 이건 할머니 박영옥의 이야기다.


서류상에서라도 아버지가 존재하니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어른들은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고, 싸워도 소용없는 일이라며 매사에 먼저 머리 숙이는 굴종을 선택한다. 남편도 시가 식구들도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다. 남편은 그녀가 아파도 자신의 밥이 먼저인 사람이다. 이건 엄마 길미선의 이야기다.


그리고 지연은 이혼했다. 사유는 남편의 외도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지연을 탓한다.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 말이 되냐고 아버지는 말한다. 심지어 엄마 길미선까지  용서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요한다. 남편도 지연을 함부로 대하는데 시댁 식구들이 오죽할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이었다.”

“여자도 잘한 건 없다”

“아무리 허접한 남자라도 울타리도 되는 거야. 남자 있는 여자라야 사람들이 함부로 못해”

“나는 사람들이 남자에게 쉽게 공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의 이혼을 언급하며 나를 욕했듯이”


삼천, 영옥, 미선과 지연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지극히 개별적인 그들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 같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화나고 슬프고 속상하다. 신분이 미천해서. 남편이 없어서, 아버지가 없어서, 여자라서  참아야 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삶은 지금도 모양새만 바꾸고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그 옛날에도 남녀 구분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새비아저씨도 있었고 지금은 우리 곁에도 , 우리  엄마들 옆에도 친구들이 있다.


삼천의 친구 새비

새비의 딸이자 박영옥의 친구 김희자

개성에서 피난 온 삼천이네를 품어준 새비고모 박명숙

길미선의 친구 명희 언니

이지연의 대학 동아리 친구 지우


내가 차린 밥을 맛있다고 말해주는 친구, 내 아픔을 나보다 더 아파하는 친구,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강한 척하느라 아픔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친구, 내 말을 들어주는 친구 , 손익을 계산하지 않는 친구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들 곁에는 우리가 고단할 때 잠시 쉴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이름 모를 친구들이 있다. 예전의 지연은 지하철에서 자신의 어깨에 타인이 머리를 기대는 것을 싫어했다. 어깨를 비틀어 기댈 수 없게 하든가 짜증 나서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연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할머니를 다시 만나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조금씩 조금씩 회복하고 성장한다. 지금의 지연은 기꺼이 어깨를 내어준다.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럼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별것 아닌 그 마음….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지연에게 내려온 그 마음이 참 좋다. 별것 아니지만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 마음 덕분에 어두운 밤이 밤이 밝게 보인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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