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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알송알 Jun 17. 2022

덕분에 책을 읽게 됐다고요

마르크 로제 작가의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를 읽고

“다음 주부터 안 오셔도 됩니다.”

1학기 동안 진행하기로 한 책 읽어주기 활동이 학기 중에 갑자기 종료되었다.  2006년 봄 ‘동화 읽는 어른 과천지회’에서 우리 동네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기를 시작하였다. 매주 수요일 나를 포함한 5명의 ‘동화 읽는 어른 ‘회원들이 각자 맡은 반을 방문하여 1교시 수업 전 20분에서 30분 정도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었다. 책 읽어주기는 모든 아이들이 좋은 책을 읽고 즐기는 사회를 꿈꾸는 ‘동화 읽는 어른’의 주요 활동 중 하나이다. 교장선생님과 학교 도서관 사서 선생님의 지원을 받아 시작했지만 해당 담임 선생님들의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잘 운영해서 담 임선 생님들의 마음을 돌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왜 실패했을까.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를 읽으며 그때의 실패가 떠올랐다. 이 작품은 책과 담을 쌓고 살던 소년 그레구아르와 평생 책과 문학을 사랑해온 피키에 할아버지가 책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우정을 나누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파킨슨병 환자인 피키에 씨는  운영하던 책방을 정리하고 노인요양원에서 지내는 할아버지다. 그레구아르는 프랑스 대학입시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하지 못한 20%에 속하는 18살 청년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인요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힘든 주방일에서 잠시 벗어날 꼼수로 피키에 할아버지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그레구아르의 책 읽어주기는 어느덧 노인요양원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는다. 책방을 운영하고 낭독가였던 피키에 할아버지는 그레구아르에게 책 읽어주는 기술을 차근차근 알려준다.



- 어쨌거나 잘못된 만남을 피하기 위해서는 듣는 귀의 수준과 책의 수준을 제대로 맞춰야 해. 낭독회가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 되었으면 좋겠어.

- 책을 가져가서 연습하도록 해.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걸 1 이는지 대충 재보고 , 낭독회를 한 번 하는 동안 단편소설을 몇 편이나 읽을 수 있는지 계산해봐

- 절대로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전에는 시작하지 말거라

- 보렴, 여긴 이건 그냥 마침표가 아니야. 여기서는 긴장감이 느껴지게 읽어야 해. 숨을 한껏 들이마셔. 호흡을 좀 주라고. 대단히 중요한 거야. 너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텍스트를 위해서 말야.

- 아이들이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에 맞춰 제때제때 자연스럽게  책장을 넘기려면 요령이 필요하다. 피키에 씨는 자신의 떨리는 손으로 내가 두 손을 어디에 어떻게 위치시켜야 하는지 직접 보여준다.

- 그레구아르,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언어학자들이 한 말인데 , 네가 낭독하는 시간 동아 너에게 귀 기울이는 청중도 그만큼의 시간을 쓰고 있는 거야. 낭독 시간이 너무 길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 제목, 작가 이름, 번역가 이름을 기록한다. 책방 할아버지는 나에게 항상 번역가 이름을 언급하라고 가르쳤다. 그들이 기여한 몫에 대해 정당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다.

피키에 할아버지가 그레구아르에게 전수해주는 낭독의 기술을 정리해보니,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내가 고민하고 노력했던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나도 아이들에게 읽어줄 책을 고르는데 공을 많이 들였다. 초등학교 2학년에게 햄릿을 읽어줄 수 없다.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매번 옛이야기만을 읽어 줄 수  없다. 함께 하는 활동가들과 수시로 의견을 나누고 아이들의 반응을 참고했다. 특정 나라, 특정 작가의 작품에 편중되지 않도록 했다. 책이 선정되면 그때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우리 아이에게 먼저 읽어주고 의견을 물어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책 선정은 실패의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책이 선정되면 연습을 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천성이라 연습을 많이 해야 했다. 아이들이 책을 잘 즐길 수 있게 낭독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아이들이 그림을 잘 볼 수 있게 하려면 책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어느  부분에서 책 읽기를 멈추고 아이들과 눈맞춤을 해야 할까. 인물마다 어떤 목소리가 어울릴까. 굵게 가늘게 걸걸하게 부드럽게 - 목소리 변조의  달인의 될 뻔했다. 너무 빠르거나 늦지 않도록 읽는 속도를 재어가며 연습하고 연습했다. 피키에 할아버지는 그레구아르에게 수영을 하라고 한다. 낭독은 호흡이 중요하다면서 말이다.  나도 책 읽어줄 때 발음이 꼬이고 호흡이 딸린 기억이 난다.  심지어  내 고향인 경상도 억양이 튀어나올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내 낭독이 실패했나?


청중들이 자리를 잡기 전에는 시작하면 안 된다고 피키에 할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9살 아이들은 아침부터 기운이 넘친다. 자리에 앉아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등교시간이 지나도 지각생 몇 명은 꼭 있었다. 옆 반은 시작하기 전에 담임이 정리정돈을 해주시던데 내가 맡은 반의 담임은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었었다. 늘 어수선한 상황에서 시작했다. 내 어린 시절에 선생님들이 왜 그렇게 합죽이를 불러대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낭독을 시작하기 전에 퀴즈, 노래, 손뼉 치기 등등으로 시선을 모아 놓아도 아이들은 금세 딴짓이다. 왜 나는 아이들을 이야기 속으로 확 빨아들이지 못했을까.


담임들은  우리들이 책을 읽어주는 날은 수업 시작하기가 유난히 힘들었다고 하셨다. 활동 중지 이유를 몇 가지 말했는데 기억나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아이들이 산만하고 어수선해져서  면학분위기 잡기가 어려웠다나. 우리 반이 특히 소란스러웠는데 아무래도 활동 중지는 내 부족함때문인 것 같다.


그레구아르는 노인들에게 책 읽어주기를 하면서 자신도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된다.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며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매듭들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낀다. 스스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하고 낭독할 책 선정을 두고 피키에 할아버지와 다른 의견을 내놓을 정도다. 그레구아르의 낭독을 노인 요양원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좋아한다. 책을 대하는 그의 진심이 통해서 이리라.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 나는 숙제처럼 했나. 30명이 넘는 아이들 앞에 서는 것이 겁났다. 무조건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부담감 때문에 아이들이 책에 몰입하지 못했나. 읽어주는 사람이 즐기지 못하는데 듣는 사람이 재미있을 리 없다. 그래도 내가 읽어준 책을 계기로 책을 좋아하게 된 아이가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  

피키에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미래가 막막했던 그레구아르는 인생을 더 이상 겁내지 않게 된다. 그레구아르는 쑥쑥 자라서 아름드리나무가 될 테다. 그레구아르는 할아버지 덕분에 책과 친해지고 ,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책을 읽게 됐다고 말한다. 내 책 읽어주기도 그런 역할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덕분에 책을 읽게 됐다고요!”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뿌듯할까? 기분이 참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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