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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알송알 Jun 21. 2022

죽음을 기억하며 지금, 잘 살자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죽는 이야기 싫다고 해놓고는... 우리 연속으로  죽음을 읽고 있다고”

봄봄 친구들과 함께 읽을 책을 3권 정도 미리미리 선정해둔다.  친구 한 명이  <죽은 자의 집 청소>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다른 친구는 여름인데 밝고 상큼하고 시원한 이야기를 읽고 , 죽음에 관련된 책은 가을에 읽자고 했다. 가을에 죽음을 이야기하면 더 쓸쓸해질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우리는 죽음을 미루기로 했다.  예전에 읽기로 했지만 읽지 못한 <인형의 집>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다들 좋아하는 책방 이야기를 기대하며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를 읽었다. 그리고 계획에 없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다.


“뻐꾸기 둥지의 맥머피의 죽음, 책방 할아버지 피키에의 죽음 그리고……”

“그뿐이 아냐. <우리들의 블루스>의 옥동 할머니도 죽었어.”

“<나의 해방 일지>의 엄마도 ……”

“나는 지난주에 부고를 2장이나 받았어.”


외면하고 싶다고 죽음을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건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그 뭐드라, 우리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메멘토 모리’ 그건가. 가만가만 생각해보면 지금껏 우리는 죽음은 우리와 상관없거나 상관있어도 아직은 멀리 있다고 여겼다. 만약 몇 년 전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나의 해방 일지>,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았다면 그들의 죽음에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껴도 지금처럼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다른 이야기에 더 집중하지 않았을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시 러시아 상류층 사회의 삶의 기준을 따라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간다.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가. ‘  이반은 처음에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점차 그는 죽음을 부정하다가  죽음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다가, 누군가의 위로를 원하다가 서서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되묻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는다.


점점 죽음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 죽음이라 해도 그렇다. 수시로 부고장을 받는다. 죽음은 내 생각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것 같다. 죽음이 무엇일까? 봄봄 친구들과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를 나눴다.


나는 죽는 사람이 부러워. 그렇다고 스스로 죽겠다는 것은 아니야. 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용기도 없어.  세상의 고통을  사람은 드디어 끝내는구나.  부럽다. 신의 소명을 다했구나 이런 마음이 들어

“나는 어느 정도 살만큼 살았다 싶을 때 내가 내 삶을 끝내고 싶어. 그렇게 하려면 정신이 온전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야. “

“입만 열면 죽고 싶다던 할머니가 병원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시는 걸 봤어. 도대체 뭘까?”

“죽음을 생각하면 정리정돈을 하고 청소를 하거든. 내 흔적이 깔끔했으면 해서 말이야. 어느 날 청소가 죽은 후가 아니라 지금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그런 마음이 메멘토 모리인 거지?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의미잖아. 그런데 왜 나는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죽을 건데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나 싶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먼저 들까? 그렇다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막 살 수도 없고 말이야.”

“죽음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대는 것 같아.”

“잘 살자. 우리…..”

“내가 죽으면 슬퍼하지만 말고 기뻐했으면 좋겠어. 잘 살다 갔다고 말이야.”


죽음을 이야기하다가 자신의 삶을 잘 꾸려나가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여전히 죽음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막상 코앞에 직면하면 담담할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때 두렵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을 때 행복했던 기억이 많이 났으면 좋겠다. 기쁘고 충만했던 순간이 많이 떠올라 죽음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죽음이 덜 무섭지 않을까. 내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잘 살다 간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이기적이고 사랑도 배려도 없는 삶을 살면 이런 말 안 해주겠지? 일단 내가 잘 살아야겠다. 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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