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알송알 Feb 09. 2022

배려 is ……

받는 사람이 미안해하지 않아야 한다


다리가 아팠다. 허리까지 아팠다. 나는 간절하게 앉을자리가 나기를 바랐다. 멀리 빈자리가 생긴다면 가방을 던져서라도 자리를 차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붐비지는 않았지만 내 아픈 다리를 잠시 쉬게 할 자리는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핑크색 임산부배려석.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분홍색이 얄미웠다. 에휴. 서있는 사람도 몇 명 없고 임산부로 추정되는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고 해서 그다지 문제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언젠가는, 내가 지금보다 더 쇠약해지면, 그날이 오면 경로석이든 임산부 배려석이든 자리가 비면 냉큼 앉아버리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경로석(지금은 교통약자석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니 앞으로는 교통약자석으로 함) 비어 있어도 앉으면 안 된다고 하셨던 윤리 선생님의 말씀이 가끔은 원망스럽다. 그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워 두느니 노약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잠시라도 앉는 것 맞지 않나? 사람이 앉아야 비로소 의자라고 할 수 있는 의자의 기능과 효율성을 고려해도 비워두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얘들아, 생각을 해봐. 너희들이 교통약자석에  앉아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타셨어. 너희들은 자리를  비켜 드리겠지?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때 할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너희들에게 미안함을 느끼시지 않을까? 어쩌면 너희들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상대로 하여금 미안한 마음을 느끼게 하면 배려가 아니니 교통약자석 자리는 무조건 비워두어야 한다고 하셨다. 임산부배려석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미안한 마음을 느끼며 자리에 앉게 하면 취지에 어긋나며 의미가 없다나.


내가 조금만 선생님의 가르침을 흘려듣는 학생이었다면 앉았을 텐데… 비어있는 자리를 흘낏흘낏 거릴 뿐 앉을 엄두는 차마 내지 못하는 나를 비웃듯이 청년이 앉았다. 아이쿠. 배 아파. 다리 아파. 허리 아파.  ‘아기를 가졌나? 그러기에 어려 보이는데? 에구머니나. 이봐요. 임신한 사람이 하이힐 신으면 안돼요. 스키니진도 태아에 해로울 텐데……’  전혀 임산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임신했다고 내 맘대로 가정하고 속으로 궁시렁궁시렁거렸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임산부일 수도 있다. 초기 임산부는 티도 안나고 본인도 인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임산부배려석도 생긴 거 아니겠나. 별별 생각을 다하는데 사람이 바꿨다. 이번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어른이다. 아줌마와 20~30대 남자청년들은 민망해서 임산부배려석에 거의 앉지 않는다는 썰이 있던데 아닌가 보다. 아니면 늦둥이를 가지셨나? 이제 낳아서 어떻게 키우시려고 그래요?


상상의 나래를 펴느라 피곤한 다리를 잠시 잊었다. 할머니가 타셨다. 아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졸거나 휴대폰을 보느라 할머니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나? 아니다. 교통약자석과 임산부배려석이 생긴 이후로 자리양보를 잘하지 않는다. 당신들 몫의 자리가 있는데 굳이 우리가  자리까지 양보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많다고 들었다. 배려와 양보를 체계적으로(?) 해보겠다고 만든 교통약자석과 임산부배려석이 본래 취지를 살리키는커녕 사람들을 계산하게 만든다.  우리는 배려를 이런 방식으로 강요당해야 하나. 얼마나 우리들이 교통약자를 배려하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배려를 강요해야 했나. 지정된 자리가 없어도 서로서로를 배려하는 사회라면 오늘같이 피곤한 날에 나도 앉을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아까  할머니가 보내는 눈총을 견디지 못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머니는 고맙다는  한마디 없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앉았다. 이것도 아닌데? .


내릴 때까지 나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아~ 다리 아파라. 그래도 나는 교통약자석과 임산부배려석을 비워둘 생각이다. 그들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