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지인이 안부나 물어볼까 하여 그냥 한 전화에 기분이 좋아졌단다. 좋은 기분을 나누고 싶어 나에게 그냥 전화를 했단다. 반가웠다.
“우리 가장 최근에 만난 때가 언제더라?”
“3년 전에 네가 서울 놀러 왔을 때.”
“우리 통화한지는 얼마나 되었지?”
“아마 1년쯤.”
“우리 친구 맞나?”
“그럼 맞지.”
푸하하하하. 핸드폰을 손에 들고 한참을 웃었다. 나도 ‘그냥'전화에 기분이 좋아졌다.
‘가끔씩 발작적으로 다정해지고 대부분 무뚝뚝하게 지내는 나는 아무 용건 없이 그저 안부를 묻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한겨레 신문에 실린 정여울 작가의 글이다. 바로 딱 내 모습이다. 나는 전화를 잘하지 않는다. 연락도 잘하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틈만 나면 집으로 돌아가던 입사 초기의 시간이 지나자 주말이나 휴일에도 집에 가지 않고 1~2개월은 연락도 없이 지내기 일쑤였다. 궁금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를 몇 번 먼저 하시던 엄마도 그러려니 하시며 포기하셨다. 가족에게도 이럴 정도인데 친구들이야 오죽했으랴. 연락은 볼일이 있거나 물어볼 내용이 있거나 전해야 할 소식이 있을 때나 하는 것이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굳게 믿는 족속이라 할 수 있겠다. 용건 없이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하고 문자나 카톡을 하는 게 간질간질하다. 낯간지러운 안부 인사를 하지 않으며 오랜 시간 연락 없이 살아도 끊어지지 않아야 진정한 관계라는 믿음이 있었다.
친구의 그냥 전화에 나도 핸드폰을 열었다. 통화 이후 7일 이내에 7명에게 전화를 걸지 않으면 불행에 빠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았지만 나도 그냥 전화를 걸어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 핸드폰을 열고 주소록을 휘리릭 넘겨보았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지? 주소록에 등록된 전화번호는 생각보다 많구나. 이 사람은 누구. 이름조차 낯선 이 사람은 애들 학교 친구 엄마인가. 재수학원 담임선생님 전화번호를 아직도 갖고 있네. 한참을 앞으로 뒤로 주소록을 한참을 훑었다.
마지막 통화 때 A는 딸아이가 많이 아프다고 했는데 좋아졌을까. 대장암 수술을 한 B의 아버지는 잘 지내고 계시겠지. C는 예전만큼 좋아하는 여행을 떠날 수 없어 답답하겠구나. 우리 아이에게 도움을 줬던 D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는지 전하지 못했는지 가물가물하다. 등산 중에 허리를 다친 E는 괜찮아졌나.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던 F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나. 전화기 속의 이름과 함께 기억이 물보라처럼 일어난다. 그런데 이게 다 언제 적 얘기더라.
우리가 연결되지 않고 있던 시간 동안 내 예측 이상의 일이 일어났을까 봐 물어보기 겁난다. 고단한 생활중에 문득 걸려온 내 전화가 반가울까.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지금 이 시간이 통화하기 불편한 시간이면 어떡하지. 어휴 … ‘그냥’이 되지 않는다. 어렵다. 힘들다. 왜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는 걸까. 끊어지기 직전의 낡고 헤진 끈을 발견한 기분이다. 손으로 살짝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다. 머리와 가슴속에 지우지 말고 기억하고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오만했구나 싶다.
주소록을 몇 번이나 검색하다가 많고 많은 친구들 중에서 그나마(?) 자주 연락을 하고 지내는 친구에게 ‘그냥’ 전화를 했다. 우리처럼 무심한 친구도 없을 거라며 그래도 우리는 친구 맞다며 또 웃음이 터졌다. 친구는 위염으로 밥을 제대로 못 먹어 살이 많이 빠졌다며, 만나면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놓았다. 친구는 안부를 물어 주어,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전해주어 고맙단다. 덕분에 자신의 안부도 전할 수 있어 좋다며 조만간(?) 또 통화하자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괜히 눈물이 났다. 나는 잘 살고 있으니 굳이 안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잘못이었다. 힘든 친구들이 나에게 연락을 먼저 할 수 있을까. 잘 지내고 있는 내가 먼저 안부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나는 잘 지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주 안부를 물어야겠다.
나는 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