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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알송알 Aug 23. 2022

박완서 작가가 좋아요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보았다. 쓰다 보니까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울거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때그때의 쓰임새에 따라 소설적인 윤택을 거치지 않은 경험 또한 없었으므로, 이번에는 있는 재료만 가지고 거기 맞춰 집을 짓듯이 기억을 꾸미거나 다듬는 것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짓기를 해보았다.”


봄봄 친구들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기로 했다. 책을 꺼내 작가의 말을 읽자마자 어떤 기억이 소환되었다. 속상하고 마음 아팠던 기억이다. 2019년 여름, 친구와 함께 성평등에 관련된 강연을 들었다. 더운 여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듣는 강연은 좋았다. 양성평등과 성평등이 다른 의미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성인지 감수성을 조금이나마 예민하게 만들어준 감사한 시간이었다. 4회 차 강연이었고 회차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은 고역이긴 했지만 말이다. 강연 시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출퇴근 시간을 적절하게 피해 주는 주최측의 센스에 감탄했던 것으로 보아 얼추 맞을 것이다. 나는 겸사겸사 점심밥도 공짜로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어느 날 여러 사람들과 점심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 박완서 작가 이야기가 나왔다. 어찌나 반갑던지 박완서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했다.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어느 분이 비난을 시작했다. 너무 게으른 작가라나? 대중의 박수는 얻었으나 문학계의 평가는 좋지 않다나? 40세에 등단한 후 돌아가실 때까지 장편소설, 단편소설, 에세이등 다양한 형식과 소재로 글을 계속 쓰셨는데 게으른 작가라니 말이야 막걸리야? 자전적 작품이 지나치게 많다는 이유를 대었다. 새로운 소재로 글을 쓰지 않고 사골 국물 우려내듯이 작가의 경험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나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그 남자네 집> , <엄마의 말뚝> 등등 많은 작품에서  <나목>이 무한 반복하고 있단다. 작가라면 응당 해야 하는 사회적 책무를 하지 않고 자신의 과거만 계속 늘어놓는다나.


“그분이 겪은 한국전쟁이 얼마나 아프면 그랬을까요? 저는 충분히 이해되는데요.”

그날 내가 한 말은 이게 전부다. 반박을 제대로 못했다. 속상하다.  


나와 박완서 작가의 첫 만남은 <서있는 여자>이다. 80년대 후반, 20대 초반의 나에게 그 작품은 충격이었다. 한 번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우리 엄마의 삶이 가부장제의 억압이고 폭력이라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내의 삶과 일을 존중하지 않는 남편에게 이혼 요구를 던지는 연지는 얼마나 멋지던지, 나도 나 자신의 삶과 일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야지 했다. <서있는 여자>에 이어 <휘청거리는 오후>,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살아있는 날의 시작>을 읽었다.

<휘청거리는 오후>는 나에게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 찬 결혼 문화에 대해서 고민하게 했다. 시가이든 친정이든 가족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어떤 결혼을 해야 하나. 비혼 선언을 해놓고 이런 고민을 왜 했을까? 그러고 보니 아무도 나의 비혼 선언을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 대를 이어야 한다며 아들을 고집하는 시어머니,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자 죄인처럼 사는 혁주의 아내, 아빠 없는 아이의 불이익을 걱정하며 자신을 배신한 혁주의 호적에 아이를 올리는 문경의 모습은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아들이 뭐라고. 남자로 태어난 것이 벼슬인가. 이런 세상에서 여자들은,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살아있는 날의 시작>에서는 미용실을 운영하며  청희 덕에 풍요롭게 사는 가족들이 그를 무시한다. 밖에서 일하는 여자는 여자답지 못하다나 뭐라나. 그렇게 막 대하면서 청희가 벌어온 돈을 쓰고 싶을까?

<나목>은 한참 후에 읽었다. 첫 만남 덕분에 나에게 박완서 작가는 여성운동가이다. 김지영이 태어난 1980년대에 벌써 문학으로 여성운동을 시작하신 분이다. 그의 작품이 페미니즘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수필가 박완서도 좋다. <꼴찌들을 위한 갈채>는 꾸준히 읽히고 있는 산문집이다.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부조리와 모순을 독자에게 툭 던지는 문장이 탁월하다. 아이들을 위한 글도 제법 남겼다. 동화도 있고 그림책도 있다. 어른을 위한 작품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이들을 위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런 분을 어떻게 게으르다고 할 수 있지? 정세랑 작가가 그랬다. ‘박완서 소설가는 한국어로 소설을 읽는 사람이 남아 있는 한, 언제까지고 읽힐 것이다.’ 정말 동의한다. 나는 정세랑 작가도 좋아한다.

함께 밥을 먹던 누군가 그에게 페미니즘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 추천을 부탁했다. 그의 입에서 낯선 외국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 흘러나온다. 아, 네. 그러시구나. 박완서 작가를 비난한 그에게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쏙 들어갔다. 없는 말주변과 허술한 말발로 대거리할 자신도 없었지만 말하다가 혀를 씹을 것 같은 작가들만 추천하시는 분이라면 내가 굳이 뭐… 하하하.


나는 누가 뭐래도 박완서 작가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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