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알송알 Feb 11. 2023

결혼학교의 교과서로 추천합니다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고

오래전 일기를 우연히 읽을 때가 있다. 때로는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살아나 마음이 어지럽지만 대개는 피식피식 웃음이 샌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바보처럼 굴었을까? 좀 더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을까? 지금의 나라면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었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낭만적 연애를 거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지지고 볶으며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다큐 같기도 하고 심리학서적 같기도 한데 나는 마치 내 일기를 읽는 것 같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라비와 커스틴은 결혼한 지 16년이 지났다. 두 사람이 16년 동안 겪은 일을 이미 나는 다 겪었고 12년을 더 살았으니 알랭처럼 글로 남기지도 못해도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300여 쪽이 되는 전체 분량 중에 낭만적 연애는 50쪽 정도이다. 낭만은 짧고 현실은 길다. 연애는 짤고 강렬하고 일상은 길고 지루하다. 그러고 보니 한국어판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원제 ‘The course of Love‘보다 훨씬 작품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라비는 열다섯 살부터 17년 동안 자신이 출연했던 수많은 멜로드라마를 그만 찍기로 하고 커스틴과 결혼하기로 한다. 왜 커스틴일까. 왜 나는 남편과 결혼했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역시 ‘타이밍’인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라비의 입장에서 기술된다. 남편의 감정과 생각은 잘 묘사되었으나 아내의 마음은 충분히 그려지지 않은 것 같다. 라비와 커스틴은 어떤 잔을 구입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충돌로 심하게 다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에게 화가 났던 이유를 까맣게 잊고 다시 잔을 사러 갔다고 라비는 말하는데 정말 커스틴이 다 잊었을까. 기억력이 나쁜 척한 게 아니고? 우리 부부도 별것 아닌 일로 많이 다퉜다. 신혼 초에 양념간장 만드는 방법을 시어머니에게 여쭤보지 않았다고 토라졌던 남편이 생각난다. 그게 토라질 일이냐고.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암튼 우리는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자기 전에는 무조건 화해를 한다는 약속을 했고 그럭저럭 잘 지키며 살았다.


연애 때는 잘 보이지 않았거나, 보여도 자신이 다 품을 수 있다고 여겼던 상대의 결점이 참을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온다. 청소분담을 어떻게 할 것인지, 친인척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다림질을 누가 하느냐, 약속시간 몇 분 전에 출발하면 적당한지 다툰다. 일상이니까 그렇다.  주택구입대출금은 갚아도 갚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하다. 아이가 생기면, 산 넘어 산을 넘는 기분이다. 늘 분주하고 항상 피곤하다. 가족을 위한 상대의 행동에 감사의 마음보다 당연하다는 마음이 더 커진다. 라비와 커스틴의 결혼 이야기는 나와 남편과 별다르지 않다.


오랜 일기장을 다시 꺼내 읽다 보면 시들해진다. 이 작품도 그랬다. 안 읽어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들, 공감은 되지만 새롭지 않고 깨달음도 덜하다. 그래도 라비가 결혼한 지 1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이유는 참 좋다.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에,

자신이 완벽하지 않음을 자각했기에,

결혼제도와 삶의 속성이 상대방이 까다롭게 보인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섹스는 사랑과 불편하게 동거하리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상대와 자신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상대가 나보다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때로는 상대가 모르는 것을 비난하지 않고 가르침을 줄 수 있게 되었기에 ,

영화와 소설에 묘사된 사랑이 그가 살면서 터득한 사랑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라비는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16년을 살고서야 말이다.


라비의 깨달음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결혼은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결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책 제목이 ‘The course of Love’이었나 보다.  결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학교가 있으면 좋겠다. 부모와 주위 어른들의 생활을 통한 배움은 한계가 있다. 결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나면 결혼하기 싫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결혼을 포기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결혼의 의미를 깨우치고 결혼하면 낭만적 연애에서 현실로 전이하는데서 발생하는 충격이 덜하지 않을까. 라비의 16년보다는 빨리 사랑을 이해하고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결혼학교가 생긴다면 이 책을 교과서로 추천하고 싶다. 30년쯤 결혼생활을 한 나 같은 사람보다 막 결혼이야기를 써내려 갈 이들이 읽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박완서 작가가 좋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