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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알송알 Jul 22. 2022

스토너  박사님, 아이에게 왜 그랬어요?

존 윌리엄스 작가의 <스토너>를 읽고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는 이렇게 시작한다. 첫 단락을 읽으면 이 작품을 다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 농부의 아들 스토너가 대학에 입학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그의 삶이 시간이 흐르는 대로 서술된다. 대학 입학, 전공 변경, 박사 학위, 결혼, 학자와 교육자의 일상, 퇴직 후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스토너의 삶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얼핏 보면 그는  실패한 사람이다.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않았고 교육자로서 그를 기억하는 제자들은 별로 없고 학문적 성과도 미미하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는 이뤄질 수 없어 헤어졌다.


하지만 스토너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학문을 시작할 수 있었고 끝까지 해낸 사람이다. 스토너는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일을 한다. 읽는 내내  스토너는 버티고 견디기만 할까. 도대체 왜?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답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너의 죽음에 이르면 감동이 몰려온다. 삶이란 원래 버티는 것인가. 오랜 시간 견뎌온 삶은 그 자체로 뭉클하다. 그가 마냥 버티기만 한 것이 아니란 것을 이해했다.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우리들의 삶은 그 누구의 이야기라도 감동이지 않을까. 좋은 작품이다.


나는 스토너가 밉다. 스토너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아내 이디스는 히스테리하고 분열적이고 파편적이고 조울증 기질이 있는 사람이다. 부녀 사이를 질투하는 아내에 의해 딸과 사이도 멀어진다. 정신분열적인 엄마의 양육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빠 사이에서 딸아이 그레이스도 망가진다. 딸을 위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봄봄 친구들은 스토너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무엇을 해도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스토너의 상황은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이해된다고 한다. 나도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하다. 아이를 위해서 이혼을 하든가 아니면 아내와 딸을 떼어 놓던가… 무엇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의 성정으로 무리였다고? 아니다 그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스토너의 강단은 보통 이상이다. 가족의 농사에 도움이 되려고 입학한 학교에서 영문학에 매료되어 전공을 농학에서 문학으로 바꾼다.  그는 의지가 강하다. 두 번의 전쟁 때 학생과 교수들이 너도나도 자원하여 전쟁터로 휩쓸려 가는 혼란 속에서도 그는 입대하지 않고 학교에 남아 공부를 계속한다. 자신을 괴롭히고 배척한 학과장에게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 그는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학문적 공감대가 형성된 제자이자 동료 교수인 캐서린과 사랑을 위해 애쓴다. 남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불륜이지만 최선을 다한다.

이런 그를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버티기만  사람이라고 말할  있을까. 나는 스토너는 자신의 의지와 신념대로 행동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딸을 위해서는 가만히 있기만 했다. ?


스토너에게 삶의 의미는 ‘학문’이다.  영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힘들고  성과가 미미해도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스토너의 성정으로 보아  불륜을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스토너가 캐서린과 사랑에 빠진다. 애틋하고 아름답지만 불륜이다. 영문학이라는 공감대가 없었다면 이 사랑도 없었을 것이다. 스토너는 자신이 사랑하는 영문학이 있어 평생을 버티고 견뎌낼 수 있었나. 아무리 그래도 딸아이를 위해서는 좀 더 애써야 했다. 아내와 부딪치기 싫어 딸을 방치한 것 아닌가. 아이를 지켜보고 견디기만 해서는 안되었다. 극성을 부렸어야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책장을 덮을 때쯤 스토너의 삶이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그의 딸을 생각하면 슬프고 속상하고 안타깝다. 스토너, 아이에게 왜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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