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원의 소설 「균열」, 「모반」을 읽으며
십일월,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나무가 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여지없이 할퀴고 가는 바람에 가지들은 맥을 놓고 흔들린다. 십여 년을 사람의 손에 익어 자라온 나무가 한 떼의 사람들 손에 이끌려 심어진 지 어언 이십여 년, 꽃은 봄마다 죄 없이 피어 아름답다. 바람이 날카롭게 소리를 내며 여지없이 할퀴고 간 밤이 지나면 중년은 대문을 열고 나가 나무를 매만져본다. 밤새 얼마나 추웠느냐고 묻는다. 나무의 속살은 매우 단단하다. 그러나 속살을 감싸고 있는 껍질은 매우 얄포롬하게 만져진다. 거칠고 투박한 살결, 그것들에는 강물이 스며들어 있다. 둥글게 둥글게 여울지며 흘러 나가는 물의 살들이 이웃처럼 어우러지며 마을을 이루었다.
중년은 거칠고 투박한 살결 속에 오련하게 보이는 마을을 오류마을이라고 부르곤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치고 들어오는 불안과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주말이 되면 산책을 나가는 중년은 늘 나무 앞에서 오류마을을 들여다보곤 했다. 어쩐지 오류마을에는 강물이 있고. 강물 한 복판 너머에는 오래된 버드나무가 불어오는 실바람에 이파리 무성한 가지를 푸르게 흔들고만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 마을 어귀에 한 발자국 들여놓으면 날개깃을 접고 한숨 자려던 두루미들이 놀라 푸드덕 날아오를 것 같고, 떼 지어 물 위를 동동거리며 놀던 원앙 떼들이 사람의 기척에 놀라 앞에 선 놈들은 쏜살같이 헤엄쳐 달아나고 맨 뒤꽁무니에 있던 놈은 비실비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양으로 첨벙거리는 햇살 따스한 오후가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 들려오고 게으른 닭 울음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마을, 그곳에 손 맞잡은 사람과 다정히 서면……으음, 그곳이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어난……나 살고 싶은 곳, 무릉이 아닐까. 왜 지금 중년의 콧등은 아려오는가. 왜 중년의 눈가에 차가운 물 고이는가. 눈썹과 눈썹 사이에 꼿꼿이 서는 주름이 중년의 가슴을 후비고 간다.
지금, 중년의 책상 위에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서 있다. 십일월, 북쪽에서 불어오는 칼끝처럼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불 꺼진 서재를 응시하고 있다. 매일 밤 열두 시가 되면 반드시 잠자리에 든다는 커다란 몸집의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남자, 그는 오늘 밤 저격수 밀정이다. 자기에게는 무의미해도 쏘아야만 하는 남자 저격수……작가 오상원은 밀정 ‘박’을 지키며 해방 후 삼 개월이 지난 십일월의 어느 날 밤 신의주에 있다.
소나무가 우중충하게 세 그루 서 있는 담벽 모퉁이,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서재의 창 밖에서 창문 안을 응시하며 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가는 저격수를 지켜보고 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쪽으로 커튼이 드리운 창문 너머로 도어가 보이고, 그 도어가 열리는 순간 방아쇠는 당겨지고, 총알은 튕겨나가 표적이 된 사내의 가슴을 꿰뚫어야 할 텐데……제기랄, 서재를 향해 걸어오던 발걸음이 방향을 바꾸어 지나쳐가 버리는 것이다.
1930년 11월 5일(음력)에 태어난 작가 오상원은 자신의 나이 열일곱 살 무렵에 벌어졌던 한국 역사의 한 장면을 써 내려가고 있다. 1955년 자신의 나이 스물여섯에 열일곱 무렵의 한국 정치 상황을 떠올리며 신의주를 배경으로 하여 그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문학예술』 8월호에 발표한 작품 「균열」 속에서 작가 오상원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광기 어린 전쟁이 끝나고 난 후, 급격하게 변해가는 한국의 정치 상황을 소설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저격수 ‘박’의 의식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해방 직후 삼 개월이 지난 신의주의 공기는 음산하였다. 정당(政黨)은 해가 떴다 지기 무섭게 난립(亂立)하여만 갔다. 그리고 수다한 인물이 죽어갔다. 사회당 당수, 민주당 선전부장, 그리고 자립당(自立黨) 당수인 형도……정당 대 정당의 암투에서였던가? 시민은 그렇게 보았다. 그렇게 믿었다. 정치에 익숙지 못한, 정치 훈련이 전연 없는 시민들이 그렇게 믿은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자립당 당수인 형이 암살당하면서 그 배후의 암영(暗影)은 점점 그 정체를 밝히게 되고 말았다. 신진당(新進黨) 당수와 적산 관리권(敵産管理權) 문제에 대하여 소련 주둔군 사령관에게 항의하기 위한 공동 전선을 취하기로 손잡은 다음 날(당시 소련 주둔군은 적산계 각 공장에서 기계, 중요 자료, 식료품 등을 소련으로 공공연히 이송하여가고 있었다. 여기에 분발한 자민당은, 이곳은 결코 점령 지구가 아니며 소련 주둔군은 어디까지나 적산을 정중히 보관하였다가 우리의 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시(市)에 이양하여 줄 의무 이외의 어떠한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고 지금껏 가져간 모든 것을 반환할 것을 항의하기로 하였었다.) 다시금 신진당 당수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제 삼자의 음모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현장의 목격자인 통행인의 한 사람이었던 자립당 당원에 의하여 그 배후는 탄로되었다. 이 목격자는 압록강 상류에서 배질을 하며 국경을 끼고 오고 가는 온갖 동향을 탐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가까이에 있는 소련군 강변 경비소에 늘 가서는 잔시중을 들어주곤 하였다. 그날 밤 그는 소련 보초선에서 자립당 당수를 암살하고 도주한 그 자를 보았으며 그 자는 신진당 간부급 두 명과 강변으로 내려가 소련병의 연락으로 배를 타고 안동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동 전선을 취하기로 손을 잡았던 신진당이? 문제는 컸다. 신진당의 정체, 당수란 자의 배후, 급속도로 조사는 착수되고 문제는 핵심을 향하여 다가갔다. 조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모든 것은, 신진당의 정체며 당수란 인물의 배후는 모호하여져만 갔다. 그러나 드디어 한 명이 신진당으로 침투하여 들어가는데 성공함으로서 그의 정체 – 즉, 신진당 당수는 중공계 출신으로서 소련으로부터 밀파된 자며 신진당을 조직, 그 일당을 총 지휘하면서 우파 순수파와 접근, 외면적으로는 공동보조를 취하는 척하면서 실은 정계(政界) 동향을 내사밀송(內査密送), 주요 인물 암살, 정당 간의 암투와 내부적 분열을 조장하는 일방 시민의 관심을 사면서 인제 수립되어질 정권의 기초를 지하 공작하는 임무를 지령받고 있다는 것을 탐지했다. 많은 인사가 이 자의 음모에 넘어진 것이다.
이 자는 그냥 둘 수 없다. 이 자를 죽여야만 한다. 허다한 희생이 눈앞에 임박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 누가 쏘느냐? 쏠 사람은 많다. 이 자는 형을 죽였다. 그로 인하여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물론 쏠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내가 쏘아야만 한다. 모두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무의미하다. 왜? 그에게는 무의미하다고 생각될 뿐이었다.
― 오상원 「균열」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74~175쪽, 이하 동일)
오늘의 표적 신진당의 당수인 사내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죽어 마땅한 자일 수 있다. 특히 저격수 ‘박’이 그자를 향해 총탄을 날린다 하여 이상할 것은 크게 없을 것이다. 처음 정치의식이 미흡한 시민들, 정치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던 시민들에게 정당 대 정당의 암투로 보였을 때까지라면 몰라도 배반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 상황에서 그에 대한 암살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균열일까. 아직은 균열이 아닐까.
거북이 등딱지 무늬처럼 틈이 생겨 갈라지는 것을 균열〔龜裂〕이라 한다. ‘나에게는 의미가 없지’만 쏘아야만 한다고 자꾸 다짐을 해가는 ‘박’의 우유부단함은 저격수 밀정의 의식에 생기는 파열음 균열일까? 그것이 무엇이건 탐탁지 않다.
‘박’의 위치는 밀정이다. 그 자리에 선 이상 생각 따위는 필요 없다. 표적을 향해 겨눈 방아쇠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날아가 꽂혀야 한다. 눈빛은 냉정해야 하며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는 차가워야 한다. 표적, 그 자는 민족의 적이다. 정치는 소련 점령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일찍이 만주로 떠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갔던 애국지사들의 조국을 향한 마음에 이민족에 의한 또 다른 형태의 점령 따위는 없었다. 그것이 미국이든 소련이든 대한민국을 통치하려 드는 것은 명백히 침략 행위이고,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침략전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표적, 그는 중공계 출신으로서 소련으로부터 밀파된 자였다. 그리고 신진당을 조직하고 그 일당을 총지휘하면서 우파 순수파와 접근하였다. 외면적으로는 공동보조를 취하는 척하면서 실은 정계(政界) 동향을 면밀히 조사하여 유출했으며, 자립당 당수와 같은 주요 인물을 암살했다. 또한 정당 간의 암투와 내부적 분열을 조장하는 한편 시민의 관심을 사면서 앞으로 수립될 정권의 기초를 다지는 임무를 지령받고 있는 적이었다. 적산 관리권(敵産管理權) 문제에 대하여 소련 주둔군 사령관에게 항의하기 위한 공동 전선을 취하기로 손잡은 다음 날 자신을 만나러 오는 자립당 당수를 암살했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둘 경우 앞으로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표적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자로 인하여 자립당 당수였던 자신의 형이 죽었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두 말의 여지가 없다.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그런데 칼끝처럼 맵게 파고드는 십일월의 북쪽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어두운 창밖에서 ‘박’은 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자신을 몰아세워가고 있다. 자신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라고 주저하고 있다.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 노래
흘러가는 저 강물 가는 곳이 그 어데뇨
조각배에 사랑 싣고 행복 찾아 가자요 - 손석우 작사 박시춘 작곡, 노래 백설희
살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밖에 나가 돈을 벌지 않은 지 어언 오 년이 넘어가고 안에서라고 특별히 돈 될 만한 일도 없다. 그런데도 하루 세 끼 굶지 않고 남들 보기에 눈살 찌푸리지 않을 만큼 차려입고 다니기도 한다. 매달 빠져나가는 보험료가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혼자서 어디든 다닐 수 있을 만큼 잘 버텨주는 자동차도 있다. 고속도로를 달려가도 그냥 빠르게 패스하게 도와주는 카드도 운전석 앞에 붙어 있다. 매우 오래된 기종이지만 어디든 갈 수 있게 안내해주는 친절한 내비씨도 앞 유리창에 붙어 있다. 이만하면 부족함이랄 것이 특별히 없는 데도 중년에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자꾸 밀려든다.
뚱뚱해졌다. 55 사이즈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거울에 비춰보던 날들이 아직도 기억 속에 찬란하건만 66 사이즈로도 안 되는 몸이 77 사이즈와는 합의하려들지 않는다. 운동이라고는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이지만 특별히 아픈 곳도 없다. 코로나 백신 외에는 거의 병원을 가려 하지 않는 습관으로 인하여 웬만큼 아파서는 간단한 진통제마저도 두 알은 먹지 않는다. 이만하면 꽤 쓸모 있는 몸뚱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자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떠밀려온다. 때때로 이 고장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지친 것이리라.
어디선가 자꾸만 들려오는 아우성……억울하다, 억울하다………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는 아우성이 자꾸만 들려온다. 제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타인에게서 들려오는 소리인지……그 소리가 자꾸만 따라붙어 괴롭힌다.
집착인가. 어린 시절 하루 종일 껌을 씹은 날들이 있었다. 그것은 양쪽 어금니가 있는 부분의 턱이 살짝살짝 아파서 퉤~ 하고 버려도 아쉬울 것 없을 만큼 씹어댄 것들이었음에도 퉤~ 뱉어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종류의 과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진열대 맨 아래쪽에 줄줄이 놓여 있는 것들 가운데 텔레비전에서 광고가 나오는 것들을 골랐던 기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 좋은 사람 만나면 나눠주고 싶어요~~ 껌이라면 역시~~ 라랄라 아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화사한 색깔의 종이에 배인 가슴 설레는 향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단물이 빠진 지 언제인지조차 알 수 없는데도 악착같이 입에 넣고 오물거렸던 날들……그러다 어느 날은 입에 문채로 잠이 들어버리기도 했었다. 아무런 감도 없이 잘 자고 일어난 아침, 머리카락은 가닥가닥 들러붙어 도대체 떼어지지가 않았다. 몇 가닥씩 눈앞으로 가져와 온 신경을 기울여 떼어보아도 그것은 떼어지지 않았다. 모공이 당겨지는 힘 때문에 쏙쏙 거리며 아플 뿐, 핑 돌아 나오는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이 밉상으로 일그러질 뿐……결국 엄마가 가져온 가위에 싹둑 잘려나가고 난 뒤에야 머리카락은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미련일까. 아카시아 꽃잎보다 하얗게, 영글어 터진 살구꽃 분홍빛으로 몽실몽실 부풀어 오른 솜사탕 손에 들고 신나서 촐랑거릴 때 불어오는 바람에 녹아내리는 단물, 끈적거림으로 내내 불쾌한 기분, 몇 번을 입에 넣고 녹여도 단물은 끈적끈적 들러붙는다. 얼른 씻어버리고 싶은 욕구로 수돗가를 향해 달려가지만 향수는 남는다. 끈적끈적 거리는 불쾌함보다 좋은 사람 옆에서 한껏 부풀어 올랐던 설렘과 화끈거리던 수줍음……그것은 가슴 붉은 곳에 새겨져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미소로 되살아났다. 불쾌함은 추억으로 씻겨나가고 설렘과 수줍음은 그리움으로 남아 언제까지고 빛바랜 심장 속에 살아서 뛴다.
중년의 의식에 균열이 생긴다.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겪어낸 수많은 일들을 털어내려 잊으려 애쓰며 살아왔다. 얄궂은 인연으로 서로의 삶 한 부분에 덫을 놓고 그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의 얼굴을 잊으려 애쓰며 살아왔다.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쓰고 제대로 보려고 해야 하는 순간에도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지 않겠어? 차라리 잊어주는 것이 좋지 않겠어? 생각하며 스스로 무덤덤해지려 노력해온 시간들이 있었다. 어느 기억 앞에서는 때때로 인간의 뇌 속 한구석에 망각의 주머니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얼마나 생각의 덫으로부터 기억의 덫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쳤던지 과거의 많은 부분들이 사라져 버렸다. 기억해내려 해도 아주 짧은 영상뿐, 마주쳐도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쯤으로 누구시더라, 때로는 아주 모르는, 처음 보는 얼굴이 되어버리는 ‘기억의 현재’, 그것은 어떤 아픔이 되지 못한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픈 것은 그 덫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동안 중년에게는 아주 소중한, 가장 행복했던 것들까지 함께 사라져 갔다는 것이다. 중년에게 행복은 언제나 불행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아픔과 고통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행복이 왔고, 천 원어치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이천 원어치의 쓰라림을 이자로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기억 하나와 얽힌 또 하나의 기억이 자꾸만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려 애쓴다. 꾹꾹 눌러서 집어넣으려 해도 자꾸만 고개를 내민다. 강력한 J와 우월한 H의 절묘한 조화가 이끌어낸 최강자의 싸움, 그 뒤에 숨어 가면 속에 얼굴을 감춘 또 다른 S와 역시 다른 S의 결탁 그리고 어쩌면 S와 그래도 B의 변절 ……그 밖의 버려지는 사람들, 주워지는 사람들……
싸움은 끝난 것이라고, 그 어느 누구도 강력한 J와 우월한 H가 손을 맞잡은 이상 이길 자는 없다고……겁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서 구경을 하다가 “에이, 시시한걸. 나는 또 뭐 별 것이라도 있을까 해서 나와 봤는데……그럴 줄 알았지. 들어가 잠이나 잘라네.” 뒷짐을 지고서 가끔씩 뒤돌아보며 쩝쩝 입맛을 다시는 링 밖의 사람들. 그들의 지난 삼 개월 어디쯤에서 자꾸만 들려오는 소리, 돌 던지는 소리, 아우성이 중년의 숨은 의식에 금을 그어댄다. 균열을 일으킨다. 물보라를 일으킨다.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 자를 하나 죽인다는 것, 이것이 큰 의의는 갖고 있지 않을지 모른다. 소련 점령군 치하라는 것은 모르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당의 정강(政綱), 이것은 자주 자립의 정신이다. 역사를 두고 우리는 항상 지배만 받아왔다. 정당 이념을 지키는 의미에서도 소련에서 밀파된 그 자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 자 하나를 죽임으로써 큰 수확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희생은 컸다. 또 앞으로도 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사수하여야 한다. 어디에서고 희생은 필요하다. 희생이 두려워 물러서는 자는 비겁자다! 자립당 당수, 그는 바로 네 형이었다. 부당수의 마지막 이 한마디는 너무도 아프게 그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정면으로 마주보던 부당수의 눈, 그 눈 속에는 결의와 의지와 차가운 빛이 침착하게 떠돌고 있었다. (176~177쪽)
정신을 사수하는 일은 창문 안에서 벌어졌다. 소련군 치하에서 표적 하나를 없앤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묻는 ‘박’에게 자립당 부당수는 그 자 하나를 죽임으로써 큰 수확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자립당)는 우리의 정신을 사수하여야 한다고 했다. 어디에서고 희생은 필요하고 희생이 두려워 물러서는 자는 비겁자라고도 했다. 그리고 ‘박’은 ‘나는 쏘아야만 한다.’고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창문 밖에서 ‘박’을 지켜보고 있던 작가 오상원은 창문 안에서 정신을 사수하고 피를 흘리며 죽음을 재어가던 ‘김’으로부터 듣게 한다.
김은 ‘친’에게 술을 먹여가며 다가올 순간을 향하여 숨 가쁘게 조여가며 있었다. 인제 침실로부터 일발의 총성이 터질 것이다. 그는 내의 속에 품고 있던 단도의 위치를 다시 정확히 더듬어 보았다. ‘친’은 술기가 붉게 퍼져가는 입술을 씰룩거려가며 연상 북지에서 떠돌아가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열두 시가 지나고 초조한 속에 삼십 분이 넘어갔다. 그러나 응접실 속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다. 그는 취한 척 상대의 술 기세를 더듬어가며 말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나 또 하나의 새로운 정보를 탐지하는 동시에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모 정보 지령에 의하여 오늘 소련군 주둔군 측에서 한 시에 당수를 데리러 온다는 것, 오늘 밤중으로는 돌아오기 힘들 것이며 이 비밀회의에서 결정되는 대로 정권 확립을 위하여 공작이 대대적으로 표면화되고 노골화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한 시는 다가오고 있다. 김은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또 하나의 음모를 눈앞에 보면서 이 기회를 상실한다는 것은 죽음보다도 무서운 사실이었다. 이 순간을 그대로 버리느냐? 그럴 수는 없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친’의 권총이 눈에 띄었다. 저기에는 항상 알이 재워져 있다. 안전선만 돌리고 발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친’부터 해치워야 한다. 밖에서 이런 일을 알 리가 만무하다. 급히 계획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당수를 죽이면 고만인 것이다. 당수를 죽이기 위해선 이자를 소리 없이 먼저 죽여야 한다. 시간은 촉박하여 오고 있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는 ‘친’의 일거일동을 살피며 틈을 엿보았다. ‘친’이 그에게 술을 따르려고 상체를 기울여오는 순간 그는 잽싸게 소지하였던 단도로 ‘친’의 가슴을 마주 꽉 찔렀다. 그러자 ‘친’의 억센 손아귀가 그의 목을 꾹 움켜쥐었다. 그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쳐 넘겼다. ‘친’은 뒤뚝하고 테이블로 다가서려는 듯하다가 맥없이 눈을 부릅뜨고 쓰러지면서 벽의 전등 스위치를 탁 쳤다. 순간 불이 꺼지고 캄캄하여졌다. 그는 어둠 속에서 신속히 권총을 찾아들고 이층으로 다가갔다. 그는 서재 도어 곁에 다가붙어 잠시 실내의 동정을 더듬었다. 조용하다. 가볍게 노크를 하였다. 대답이 없다. 핸들에 가볍게 손을 얹고 문을 열었다.
“촛불을 켜드릴까요?” 말과 함께 그는 남쪽 창을 등지고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향하여 일발을 발사하였다. 다음은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연달아 그쪽을 향하여 난사하였다. 반격이 왔다. 적막과 어둠을 찢는 총성과 함께 그의 내부에서도 무엇이 터져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문에 기대어 섰다. 손에는 총알은 없을망정 권총이 꽉 움켜쥐어져 있었다. 그자가 쓰러지는 것을 보기 전에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책상 곁에 맥없이 기대어 서 있는 그자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상채는 점점 기운이 없어 무너지다가 털썩 쓰러졌다. 그의 눈앞에 쓰러진 그자의 어두운 그림자를 잠시 지켰다. 이자는 쓰러졌다. 내가 발사한 총에 맞아 내 눈앞에서 쓰러진 것이다. 그의 손에 꼭 움켜쥐어졌던 권총은 그 순간 맥없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도 총에 맞은 것을 알았다. 하지만 통쾌하였다. (180~182)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의식은 ‘나는 쏘아야만 한다’와 ‘나에게는 무의미하다’ 사이에서 방황하며 ‘그래도 쏘아야 한다’를 향해가고 있었지만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무의식은 권총을 꺼내 들고, 돌을 들어 침실 창문을 부쉈다. 한 시가 다가올 무렵 주택 실내에 불이 휙 꺼지고 어둠 속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러는 동안 유리창이 깨어지고 또 몇 발의 총성이 서재에서 울려오는 동안 밖에 있던 ‘박’은 ‘김’ 동지의 안부를 걱정하며 뛰어들려 한다.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 ‘김’ 동지는 스스로 걸어 나와 밖에 있던 동지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직하고 깊숙한 방에 눕는다.
신진당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 ‘김’은 당수의 호위인 ‘친’에게 술을 처먹이며 당수의 침실인 서재에서 울려올 일 발의 총성을 기다린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북지로 돌아다니며 비적질을 하며 돌아가던 몸집이 큰 백발백중의 명사수 ‘친’을 제거하기로 되어 있었다. 또 다른 동지들은 당수의 직계 부하 두 명을 술집으로 이끌어 계집의 희롱으로 심신이 녹아들어 가게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준비가 끝난 상태, 남은 것은 ‘박’이 쏘는 것뿐이었지만 결국 통쾌함은 ‘김’의 것이었다.
“지금쯤은 그자도 나처럼 피에 젖어 쓰러진 채 죽음을 재어가고 있을 거다.” 그의 시선은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속히 간단한 응급 치료를 했다.
“괜찮어, 괜찮어. 이렇게 죽는 것이 도리어 통쾌한 거야. 쏘았지. 자식도 필사적으로 반격을 하더군. 하지만 그자는 내 눈앞에서 털썩 맥없이 쓰러졌다. 나는 그자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 끝까지.” 그의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통쾌하더군. 그 순간 나는 눈물이 확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다시 눈물에 젖어가는 그의 시선이 등잔불에 반사되어 붉게 타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통쾌하였던 순간순간이 다시금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179~180쪽)
죽음이 눈앞에서 감도는 지금에도 그 순간만은 통쾌한 것이었다. 김의 맥박은 점점 거세어가고 있었다.
“자기가 믿는 그 하나를 위하여 죽어가는 것이 인간일 것이다. 모든 것을……한 번에 모든 것을 위하여 죽기는 불가능하다. 박, 네가 못 쏜 것이 유감일 것이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심장이 가쁘게 파닥이고 있다. 박은 김의 얼굴 위로 조용히 눈을 주었다. 희미하게 타들어가는 등잔불 밑에 그의 얼굴은 몹시 흐려만 간다. 조용히 내리감았던 눈이 이따금 고통을 이겨가는 듯 경련적으로 부릅떠지고 그 눈동자는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차가이 재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인제 곧 죽어갈 것이다. 통쾌하다는 것뿐, 간단하다. 나는 네 형님을 숭배하고 있었다. 죽음에 젖어가는 김의 눈동자는 이 순간 더욱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박은 곧바로 자기를 지키고 있는 김의 시선을 받아가며 그의 손을 가벼이 더듬어주었다. 도리어 숨져가는 김의 손맥이 자기의 그것보다 강력하게 느껴졌다.
”간단하다. 복잡하다면 인간은 싸우다 죽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간단하니까 싸우다 쓰러질 수도 있는 것이지. 이것이 인간이다. 박, 그것뿐이다.
박은 김의 손맥이 힘없이 점점 풀려가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부릅뜬 눈은 차가이 박을 언제까지나 주시한 가운데 얼음장처럼 식어가고 있었다. (182~183쪽)
상황이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틈이었다. 확실한 하나의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 뛰어들 수 없는 것, 애매하게 어물쩍거리며 서성이다가 뒤돌아가고 마는 것, 그것은 배반이고 모반의 시작이다. 통쾌하게 죽을 것인가 뜨뜻미지근하게 살아날 것인가. 벌어진 틈 사이로 물보라가 일어난다.
― 균열과 모반(2)은 다음 화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