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거북등 모양으로 갈라져 흩어지는 의식의 파편들2

오상원의 소설 「균열」, 「모반」을 읽으며

by 윤슬

수백만 개 수백억 개의 눈동자가 바라보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플라스틱 막대에 물을 묻혀 후~~ 불면 둥그렇게 뚫린 구멍 사이로 부풀어 오르는 비눗방울처럼 투명한 막 속에 하나의 까만 눈동자가 파랗게 빛나고 있다. 그것들이 포도송이처럼 한 줄기에 매달려 ~당기 둥당애 둥당애당~ 흔들리며 자라고 있다. 물은 거칠게 흐른다. 바람은 물을 세차게 떠다민다. 줄기는 물을 거부하지 않는 몸짓으로 눕고 바람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몸짓으로 일어선다. 하늘은 밝은 햇살을 고르게 흩뿌려주고 푸른 공기는 점점 옅어져 가는 막 속의 눈동자들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준다.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아빠는 어디로 갔을까? 몇 백 년을 두고 몇 천 년을 두고 흐르는 물결 사이에 붙박여 떠나지 않고 굳건하게 견디는 바위는 겨울에 태어난 알들을 매달고 온몸을 내어주는 누런 빛깔의 풀에게 작은 틈을 열어준다. 감때사나운 무리들이 호시탐탐 엿보는……그러다가 순식간에 채가는 생태의 정글에서 당당한 하나의 개체가 될 수 있도록 품어주는 부성(父性)이 되고 모성(母性)이 되어 눈동자들을 지킨다.


저 건네라 큰 들이라

세고 반딱 하는 것이

울 어맨 줄 알았더니

날 속인다 날 속인다

옥사리꽃이 날 속인다.

당기 둥당애 둥당애당


저 건네 물꼬에 동백나무

저 건네 물꼬에 동백나무

울 어매가 숨겠는가(심었는가)

울 아배가 숨겠는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봐도 쥐색일세

당기 둥당애 둥당애당


둥당애 타령은 누가 냈나

건방진 큰애기 내가 냈다

당기 둥당애 둥당애당


어매 어매 일어나소

세살 봉창에 해 비쳤네

어와둥실 박넝쿨은

담장 너메 손을 주고

우리 어매 어딜 가고

내 손 쥘 줄 모르는가

둥당애당 둥당애당

당기 둥당애 둥당애당~~ ―전남 신안지방 조정임 어머님의 ‘둥덩애타령~’ 중에서


굳건하게 견디는 바위는 토닥이고 겨울에 태어난 알들을 매달고 온몸을 내어주는 누런 빛깔의 풀은 자장가를 불러준다. 밤새 토닥이며 잠을 재우는 부성의 바위와 자장가를 부르는 모성의 풀은 눈동자들보다 먼저 하품을 하고 먼저 까무룩 까무룩 잠이 든다.


언제나 없이 호기심이 강한 성급한 눈동자들은 자기가 누구냐고 묻는다. 무어라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잘 모르는 바위와 풀은 너희 어머니는 내 몸에 너희들을 알로 낳았고, 너희들의 아버지는 너희들의 몸에 정액을 뿌려놓았다고, 그리고는 다시 헤엄쳐 수심이 깊은 바다로 홀연히 떠났다고 말해주지 못한다. 나는 틈을 내준 바위일 뿐이고 나는 너희들을 잠시 맡아 길러주는 유모 모자반일 뿐이라고 말해주지 못한다. 너희들도 너희들의 부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봄이 오면 유유히 헤엄치다가 유월이 되면 우리들의 곁을 떠나 수심 깊은 바다로 떠날 것이다. 그러다 이 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다시 돌아와 수많은 눈동자들을 부려놓고 떠나는 ‘도루묵’이라고 말해주지 못한다. 그것이 너희들의 태생이라고 말해주지 못한다. 자꾸만 보채는 눈동자들 앞에서 자꾸만 머뭇거린다. 미련 때문에 집착 때문에 그것이 ‘정’이라는 이름으로 눌어붙어 떼어버리지 못하는 그 무엇이라서 두려운 탓에 선뜻 말해주지 못한다. 눈동자들마다에 특별한 이름은 없이 다만 도루묵일 뿐이라고 말해주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한 배에서 하나의 씨앗에서 태어나 자란 한 형제자매일 뿐 너는 누구이고 너는 또 다른 누구라고 규정지어주지 못한다. 다만 보내고 싶지 않은, 내 품 안의 자식이기만을 바란다고 말할 줄 모른다.

― KBS 걸작 다큐멘터리 한국의 바다숲(2021,7,25 방송분) 참조, 이하 동일


이십유여 년 전 그의 부친은 독립단에 가입하여 만주로 망명, 항일 투쟁에 전력을 기울여 싸우다가 일관헌(日官憲)에게 체포되어 갖은 악형에 못 이겨 끝내는 종신 불구자로서 가출옥되어 집으로 이송되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이미 병사하였고 어린 두 아들이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그때부터 모든 것을 잊고 남은 재산을 의지하고 오직 두 아들을 키워 그야말로 가정의 따뜻한 물결 속에 젖어보려 하였다. 완전히 부자유한 몸이 되어버린 노인에게 여생(餘生)을 즐길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아이들은 자랐다. 해방이 되었다. 두 아들은 이미 삼십 대에 이르러 있었다. 곧 그들은 난립하는 정계로 뛰어들어갔다. 노인은 말렸다. 그러나 두 아들은 듣지 않았다. 노인은 두 아들에게 다시금 자기와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젊음은 노인의 심경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정열에 넘쳐 있었다.

과도기의 정계, 노인은 잘 알고 있다. 밤마다 살기 어린 총성은 요란스러이 노인의 가슴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손님방 안락의자에 노인은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조용히 걷는 발자국 소리가 연달아 들리면 두 아들이 돌아온 것을 알고 가벼이 숨을 돌리며 그대로 눈을 감는 것이었다. 아무리 밤이 늦어도 이렇게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버지가 그대로 안락의자에 잠들고 계신 줄만 알고 잠이 깨실까 하여 그들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노인은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또 무사하였다는 것, 그 이상을 노인은 바라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노인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무겁게 어두워만 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맏아들이 피살당하던 날 노인은 안락의자에서 그대로 졸도하여 쓰러졌던 것이다.

― 오상원 「균열」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83~185쪽)


의식의 균열 속에서 통쾌함을 잃어버린 ‘박’에게 아버지는 아픔이다. 어린 시절 영웅이었던 아버지는 자라는 동안 삶의 지침이 되었다. 일본 침략자들과 맞서 싸운 아버지, 일관헌에게 체포되어 갖은 악형을 당한 아버지, 불구가 되어 돌아왔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준 아버지……아버지는 자립당 당수가 되었던 형에게 우상이 되었고, 형과 함께 자립당의 당원으로서 조국을 위해 투신하고자 했던 ‘박’의 의로운 정신에 푯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들의 의기(義氣)가 불안하고 두려웠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했던 자신의 젊은 날들의 길을 아들들만은 걷지 않기를 바랐다. 조국은 해방되었고 해방된 조국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하루 바삐 복구시켜야만 했다. 그것은 국민들의 바람이고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정당 대 정당의 난립 속에서 벌어지는 암투는 서로의 욕망에 사로잡힌 채 날마다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고 있었다. 당을 이루고 힘을 모으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결국 조국의 영달을 내세워 개인의 이익에 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의 혼란은 숭고한 희생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미세한 균열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고 미세한 틈은 차츰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신뢰할 수 없는 정치와 야망, 모반의 틈바구니에 아들들이 참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만 가정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만들고 그 울타리 안에서 범부(凡夫)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안온함과 그 속에서의 평화로운 바람들……그것을 간절하게 원했을 뿐이다.


그러나 작가 오상원은 다시금 아들을 불러냈다. 아들 ‘박’은 병원 앞, 세 시, 쏠 것 앞에 서게 되었다. ‘김’이 그자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끝까지 자신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했고, 자신은 너무 만족스러워서 그 순간 눈물이 확 쏟아져 나왔다고 말했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통쾌하고 자랑스럽다 말했다. 그런데……그자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실을 부당수로부터 전해 들은 ‘박’에게 망설임 따위 주저함 따위는 의미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하오, 정각 세 시가 있을 뿐이다.


중년이 아열대 바다를 들여다본다. 제주도의 바다 그곳에는 풍성한 감태숲이 있다. 형형색색의 연산호가 군락을 이루는 숲이 있다. 삼십 센티가 넘는 회색 줄무늬 돌돔이 얼른 보면 고릴라 같고 얼른 보면 멧돼지의 얼굴 같은 강한 인상을 남기며 지나간다. 자세히 들여다보며 피식 웃는다. 그 뒤로 파란색의 세로 줄무늬를 두른 청돌돔이 감태 잎을 살짝 뜯어먹으며 유유히 헤엄쳐가는 모습을 본다. 산수유꽃 빛깔의 꼬리지느러미가 유난히 눈에 띈다.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이다. 감태 잎 사이에 숨어 잠을 자던 독가시치가 무리를 지어 감태 잎을 뜯어먹는다. 식성이 매우 좋다. 두꺼운 잎을 한입 크게 물고 뚝뚝 떼어가며 오물거린다. 오도독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풍성하게 늘어진 감태숲 저만치에서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서로를 노려보며 다투고 있다. 어렝놀래기다. 비등비등한 몸집을 지닌 어렝놀래기 두 마리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 등지느러미를 바짝 세우고 부릅뜬 눈에 힘을 잔뜩 주어 노려보며 소리를 지른다. 얼마나 악을 쓰는 것일까. 벌어진 아가미가 바짝 선 귀처럼 보인다. 창을 꼬나 쥐고 채찍을 휘두르는 전사를 태우고 돌진하는 적토마의 결의에 찬 얼굴처럼 강인한 표정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든다. 앞으로 나아가다 뒤로 물러서고 다시 기회를 포착하려 드는 영역다툼이 격하게 벌어진다. 결국 태어날 새끼들을 천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늘어진 요새 감태 잎 밑자락은 힘이 센 암컷에게 돌아가고 만다. 아이들의 만화영화 한 장면 같아 웃음을 머금는다. 앞치마를 두르고 두건을 쓴 아줌마 물고기 둘이서 삿대질을 해가며 …… 여보세요, 이곳엔 내가 먼저 도착했다고요. 무슨 소리예요. 내가 발을 먼저 쭉 뻗었어요. 아니라구요. 내 발 끝이 요렇게 요렇게 먼저 닿았단 말이에요. 아니,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예요……한바탕 소동이 일 것 같은 아열대 바다에서 중년은 푸읍~ 소리를 내며 웃는다. 이만만 해도 평화는 충분하지 않은가.


두줄베도라치가 어디론가 헤엄쳐간다. 따라가 본다. 몸통에 흰색 줄무늬와 검은색 줄무늬를 띤 베도라치가 바윗돌 무더기 사이에서 소라껍데기 하나를 발견한다. 제법 근사해 보인다. 지나치게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소라껍데기는 암컷과 함께 할 보금자리로 안성맞춤이다. 심지어 깨지거나 모난 곳도 없다. 꼼꼼하게 살펴본다. 들어가서 앉아보고 밖으로 빠져나와 보고 안에서 밖을 내다보기도 한다. 신선한 바람이 한 줄기 지나간다. 으음, 됐어. 이제 수컷 베도라치는 대가리를 들이박고 이물질들을 물고 나와 뱉어내고 다시 들어가 이물질을 물고 나와 퉤~ 뱉어버린다. 듬직한 베도라치다. 이제는 보금자리 주변을 돌아본다. 세심하게 살펴보며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꼬리지느러미를 힘차게 흔들어 고정시키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서 촤르륵 소리가 나게 꼬리지느러미를 흔들어 고정시킨다. 매우 흡족하다. 다시금 꼬리를 밀어 넣고 앉아본다. 전망이 아주 좋다. 두줄베도라치 인생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꼬박 한나절 만에 이룬 쾌거를 두고 암컷을 찾으러 감태숲으로 간다. 어여쁜 그녀가 다가온다. 뱃속에 알을 품은 암컷 베도라치가 배시시 웃는다. 꼼짝없이 매혹적인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보석같이 빛나는 알들이 베도라치의 보금자리에 빼곡하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운 알들을 품어 키워가는 베도라치는 아빠 육아일기를 쓴다. 감태 잎 빛깔로 물들인 옷을 입고 밖을 내다보며 꼬물꼬물 집 밖으로 헤엄쳐나갈 새끼들을 떠올려본다.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는 나날을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 부른다. 그러나……


어둠이 쪽 깔려간 밤하늘에는 별들이 빙판에 얼어붙은 구슬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찬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낙엽이 우수수 발밑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그는 지금 가로수에 기대어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았다. 그는 즈봉 포켓 속에 꾸겨 넣은 신문지를 다시금 손으로 꾸겨 쥐었다. 어머니,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 순간 아래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실신한 노모’라는 신문 구절과 함께 노파의 주름진 얼굴이 어머니 얼굴과 겹쳐서 떠올랐다. 그러나 곧 ‘모두가 다 조국을 위해서다’하는 음성이 그의 마음을 뒤덮고 지나갔다.

‘이미 우리는 조국을 위해서만이 있는 몸이다. 지금의 네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보다 더 보람 있는 하나를 위해서 하나를 버려야지.’

약 이 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가 투신하고 있는 비밀결사에서는 한 사람을 암살하지 않으면 안 될 경지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계획한 그날 밤 오랜 신병 끝에 오직 한 분밖에 없는 그의 어머니가 숨져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클랙슨 소리가 짧게 밖에서 한 번 울려오고 있었다. 정각에서 삼십 분 전, 야광 초침이 파란 빛깔을 그으면서 아라비아 숫자가 나열된 동그란 원반 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클랙슨 소리가 다시 짧게 울렸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들고 어둠과 마주 섰다.

“연기는 안 돼. 생각해봐. 우리가 오늘 이 기회를 잡기 위해서 얼마나 시간과 정력을 소비했나를……그것뿐만이 아니라 오늘 실패하는 경우엔 이미 우리들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야. 지금 우리들은 삼 이라는 성공 숫자 앞에 와 있다. 알겠지? 어머니는 우리가 맡을 테다. 조국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기로 한 우리들이 아니냐?”

나직하면서도 몹시 초조한 음성이었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어머니의 신음 소리가 무겁게 방 안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 오상원 「모반」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16~218쪽)


의식을 잃고 누워 있던 어머니는 방문이 부스스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천장이 툭 처져서 내려앉은 방 안은 더욱 답답하고 어두웠다. 그는 어머니 앞으로 조용히 다가가서 꿇어앉았다. 고개를 약간 모로 눕히면서 아들 모습을 더듬어가고 있는 그 눈빛은 다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희미하게 등잔불 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

노파는 아들의 음성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간신히 흔들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머니, 의사가 왔댔어요?”

그러나 노파는 가만히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가 하여 다시 한 번 어머니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물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 표정을 조용히 지켰다. 험하게 주름져간 입술이 움직거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 손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하므로 그는 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으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만을 꾹 움켜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 뺨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미 시선과 손의 감각만으로써는 아들을 느껴볼 수가 없는 듯이 아들의 손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가슴이 뭉클 뜨거운 물결 속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순간 며칠 전 집을 나갈 때 간신히 입을 열고 중얼거리던 어머니 말씀이 눈앞에 또렷이 아로새긴 것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언제 들어오냐?”

“오늘은 못 들어올 것 같아요. 저 옆집 아주머니한테 부탁을 했어요. 그리고 좀 돌봐달라고 돈도 드렸으니까 근심 마세요. 의사도 이따 저녁에 다시 한 번 들를 거예요.”

“오냐.”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잠시 멍하니 허공에 눈을 주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만을 위해서 있단다. 나이 들면 들어갈수록……그러나 아들이야 그럴 수 있겠니? 제 할 일이 더 중한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노쇠한 어머니의 애틋한 기대를 깨닫지 못하는바 아니었으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던 것이었다.

그는 지금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자기 손을 끌어당겨다 입술 위에 대고 어루만지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 자기 손을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손은 맥없이 그대로 멈추어졌다. 그는 뼈만이 앙상한 여윈 어머니의 손가락으로부터 어머니 눈 위로 시선을 옮겼다.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희미한 어머니의 눈빛, 마치 그것은 먼지 속에 퇴색하여버린 유리알처럼 빛을 잃고 있었다. 그 순간 어머니는 지금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어두운 선을 그으며 지나갔다.

다음 날 그는 밀회 시간을 어기고 그대로 어머니 곁에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서였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집 앞에서 급히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 된 노릇이야?”

문을 열고 들어서며 조급히 지껄여대는 동료들의 말을 손짓으로 막으면서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래?”

동료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색을 흐렸다.

“그럼 내가 의사를 불러다 네 대신을 할 테니 곧 그리로 가야 할 거야. 모두 기다리고 있으니까.”

“지정된 장소로 정각까지 직행할 테니 모두에게 그렇게 일러줘.”

동료의 얼굴 위에 다시금 초조한 긴박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동료는 마치 그의 마음이 동요를 일으킨 것이나 아닌가 하고 짧게 의문을 남기며 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마주 지켰다.

“다만……”

“다만?”

“나는 다만 내게 용납될 수 있는 순간까지만이라도 어머니 곁에 있어주고 싶어서야.”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약간 말을 흐렸다.

“하지만……”

“알고 있어. 결정된 하나만을 위해서 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어머니 곁에 앉아 있었다. 의사가 여러 번 왔다 갔다. 햇볕이 점점 창문가에서 멀어지고 잔광(殘光)이 높은 축대 위 옆집 담 너머로 뚝 떨어지자 회색빛 그늘이 나지막한 이 집 마당으로 넘어지듯 내려섰다. 그리고 곧 창문가로 밀려오는 어둠의 연한 물결과 함께 혼돈된 의식이 어머니 입가에 떠돌기 시작하였다. 하얀 가운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검은 가방을 들고 의사가 찾아왔다. 맥을 짚고 조용히 머리를 떨구고 앉아 있는 의사의 손가락 사이로 노파의 맥박은 희미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밖에서 요란스럽게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울려왔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끊일 듯 이어가는 어머니의 숨결, 어머니의 주름진 눈까풀 위로 죽음의 그늘은 서서히 내리덮여가고 있었다. 그때 클랙슨 소리가 짧게 또 한 번 밖에서 울렸다. (219~222쪽)


「균열」의 ‘박’과 「모반」의 ‘민’은 평온한 일상의 행복이 머무는 공간에서 다만 평범한 아들로 사내로 살아가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해방된 조국의 재건을 위해 똘똘 뭉쳐 일어서야 한다는 애국지사들의 정당에 들어가 조국을 배반하고 동지들을 암살하며 끊임없이 모반의 꽃을 피워가는 자들의 밀실에 한 발의 총알을 날려야 하는 밀정이었다. 한 발의 총알이 목적하는 과녁에 명중하는 순간 해방된 조국의 거듭되는 혼란은 종식이 되고 빠른 속도로 안정이 되어만 갈 것 같은 생각……그것은 그들이 끝까지 사수해야 할 정신이었다. 그러나 정치는 그들을 속였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야망은 그 정신을 사수하려는 청년들의 의식에 금을 그어댔다. 초심이 흔들리는, 아니, 오로지 조국의 수호라는 숭고한 초심 그 어딘가에 실낱같은 금을 긋고 아무도 몰래 파고들어 가 모반의 씨앗을 심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순수했던 열정은 시들어가고 숭고했던 가치는 빛을 잃어가고 초심은 흔들리고 가장 소중했던 것들에게 상처를 내는……진정으로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 신음하는 고통을, 절규를 외면하고 마는……시대는 이미 과녁의 중앙을 벗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조국을 위해서만이 있는 몸이다. 지금의 네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보다 더 보람 있는 하나를 위해서 하나를 버려야지.’ 의지를 다져보지만 ‘어머니는 아들만을 위해서 있단다. 나이 들면 들어갈수록……그러나 아들이야 그럴 수 있겠니? 제 할 일이 더 중한데……’ 어머니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말은 안타깝게 들려오고, ‘나는 다만 내게 용납될 수 있는 순간까지 만이라도 어머니 곁에 있어주고 싶어서야.’ 말을 해보지만 ‘결정된 하나만을 위해 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민’에게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는 요란스럽게 울려온다. 끊일 듯 이어가는 어머니의 숨결, 어머니의 주름진 눈까풀 위로 죽음의 그늘이 서서히 내리 덮여가고 있는 중에도 짧게 울려오는 클랙슨 소리……그것은 어머니의 임종을 알리는 짧은 종소리였다. 그것을, 그 순간을 ‘민’은 지켜주지 못했다.


모반이 거듭되어가는 단기(檀紀) 4279년 늦가을, 해방 만 일 년의 환희가 혼돈된 갈등 속에서 기울어져가는 어느 날 저녁 어느 뒷골목 선술집에서 홀로 술을 마시던 이십오륙 세 가량의 청년 ‘민’의 자각은 결단을 불러온다. 택시! “한강로 쪽으로―”


공습경보는 울리지 않았다. 혈액형 B형 남자 두줄베도라치가 이웃집 A형 남자 자리돔과 신경전을 벌이며 입방아를 찧던 아침이었다. 점잔을 빼며 말꼬롬하게 차리고 나섰지만 신경은 늘 날카로운 베도라치에게 준 것 없이 미움을 받는 자리돔이 눈치를 살피며 꽁무니를 사리던 아침이었다. 소라껍데기 집이 우아하고 나름 견고해 보이지만 바위 틈서리 집도 알을 낳고 부화해 나올 때까지 살기에는 남부럽지 않게 좋은 집인데 자기 집 마당에 갖가지 오물을 떨어뜨리며 다닌다고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몸집도 작은 것이 어찌나 감때사납게 거들먹거리는지 아니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나이 한 살이라도 많은 자리돔 내가 참아야지……분을 삭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짐작을 꺼내기도 전에 저 옆집 바위 등에서 갓 깨어나 이리저리 헤엄치며 재롱을 부리던 치어들이 한자리에 얼어붙어 동동거리고 있었다. 날렵하게 헤엄칠 수 있는 물고기들은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숨었다.


쏠배감펭이 나타난 것이다. 평화는 깨졌다. 바다의 최고 상위 포식자 쏠배감펭에게 자비는 없다. 그것이 무엇이건 닥치는 대로 입에 닿는 대로 씹고 삼키고 뱉는다. 몸집은 크다. 몸통 전체에 얼룩무늬가 있다. 초원 위를 달리는 얼룩말의 무늬처럼 멋진 얼룩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 그러나 쏠배감펭은 풀을 즐기지 않는다. 아가미 옆자리 지느러미는 최고급 비단 스카프와 같다. 물방울무늬들이 호화롭게 찍혀 있는 스카프를 두르고 야유회라도 나온 것처럼 유연하게 헤엄쳐온다. 그것도 잠시, 쏠배감펭의 길이감이 좋은 스카프형 지느러미는 활짝 피어난 극락조의 꽃잎들처럼 벌어진다. 하늘을 높이 나는 새의 위용으로 활짝 펴서 먹잇감들을 한쪽으로 몰아붙이는 쏠배감펭의 또 다른 이름은 라이온 피시다. 용감한 전사의 모습으로 해조류 숲을 떠나온 자리돔의 치어들을 몰아붙여 톡 쏘는 0.02초의 순간 자리돔의 치어들은 쏠배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감펭은 양쪽 볼을 씰룩 여가며 0.02초의 사냥을 즐긴다. 소심한 두줄베도라치가 소라 집에 숨어서 나오지 못하는 아침, 쏠배감펭의 체면은 최고 상위 포식자의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자리돔에게 텃세를 부리지 못하게 된 베도라치의 바다 너머의 바다에 문제가 생겼다. 수심이 얕고 햇볕이 잘 드는 청정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다. 미역이 사라지고 없다. 감태도 모자반도 사라지고 없다. 도루묵들의 고장에 도루묵들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 거대한 숲은 어디로 간 것일까? 바위들은 분홍색으로 변해가고 점차 하얗게 메말라 간다. 사람들이 말하는 백화현상이 해조류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에게는 현실 전쟁이다. 삶의 근거지가 파괴되고 먹이가 사라지고 은신처가 사라져 버린 세상, 그곳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모두 떠나고 만 것이다.


황폐해진 숲 그곳에 굵직한 줄기가 물이 이끄는 대로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흔들리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지만 군락을 이루고 살아가던 벗들은 모두 사라졌다. 댕강댕강 잘려나가고 잘근잘근 씹히고 갉작갉작 긁히면서 사라져 갔다. 두 개의 붉은 눈이 줄기를 야무지게 감싸 안고 있다. 셀 수조차 없이 많은 가시들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줄기 곳곳을 찔러댄다. 밤송이 가시 같기도 하고 고슴도치 가시 같기도 하다. 꼼짝할 수가 없다. 주둥이 부분인가. 관족이 나온다. 여섯 개의 투명한 관족 끝에는 흡판이 붙어 있다. 그 흡판을 줄기에 찰싹 붙이고는 다섯 개의 이빨로 갉아댄다. 앙칼지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하나의 둥치에 적어도 예닐곱 마리가 들러붙어 야금야금 파먹어간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터를 지켜왔던 미역 둥치지만 속수무책이다. 채 하루도 가지 않아 아주 오래 자란 기둥이 사라져 간다.


가시뭉치 성게놈들은 한 번에 수십만 개의 알을 낳는다. 바닷물 사이에 쫙 퍼트려 놓으면 수컷 성게놈들이 달려들어 정액을 뿌려놓는다. 희뿌연 액체가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바다 깊은 골짜기로 퍼져나간다. 집단으로 산란을 하는 놈들의 개체수 번식은 점령군 주둔과 같다. 미역 숲 사이사이에 포진하여 무리를 이루고 미역 둥치를 잡아끌고는 마구잡이로 먹어치운다. 그 횡포 속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역사는 삽시간에 사라져 간다. 모두가 떠나간다. 버려진다. 잊혀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지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사람들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바다로부터 얻을 것이 있는 것이다. 백화현상 속에 얻어야 할 것들을 잃고 할 말을 잃은 사람들이 가시뭉치놈들을 잡아낸다. 날카롭게 굽은 집게를 콕 찌르며 성게놈들을 잡아낸다. 커다란 통 가득히 가시뭉치놈들이 쌓인다. 바다에 평화가 온다. 속도는 느리지만 바위 곳곳에 풀이 자라기 시작한다. 감태가 솟아나고 미역이 솟아나고 모자반이 솟아난다. 너울거린다. 두꺼워진다. 어렝놀래기가 보이고 자리돔이 보이고 두줄베도라치가 보인다. 어디론가 떠났던 물고기놈들이 고향을 찾아 돌아온다. 가시뭉치놈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개체수를 조정당하면서 다시 찾은 평화를 깨뜨리지 못한다. 공생하자고 손을 내민다. 그러나 손은 언제든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동차가 갑자기 끽 소리를 무겁게 남기며 정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쿠션에 그대로 파묻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강론데요.”

하고 운전수가 일깨워주어서야 비로소 그는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려서도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신문지를 꺼내어 펼쳤다. 그리고 주소를 다시금 재확인한 다음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러 방향을 물었다. 그는 약 한 시간가량이나 이렇게 길을 물으며 골목길을 배회하다 드디어 철로 변에 내려앉은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얼기설기 퇴색한 신문장으로 풀칠되어 있는 문을 열고 나서는 소녀는 분명히 무모하게 범죄자로서 체포된 청년의 여동생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를 보자마자

“경찰에서 오셨어요?”

하고 대번에 말을 더듬는 소녀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

그는 대답 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오빠는……”

소녀는 입을 열려다 곧 울음이 복받치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빠는 범죄자가 아니에요. 오빠를 놓아주세요. 네? 선생님!”

민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럼……신문사에서 오셨군요?”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고 좀 써주세요. 네? 오빠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아시게 될 거예요. 오빠가 결코 범인이 아니라고 한마디만이라도 좀 써주세요. 어머니가 불쌍해요. 어머니가 불쌍해서 못 보겠어요. 오빠는 어머님 약값을 구하러 나갔던 거예요. 어머니는 이대로 돌아가셔요.”

소녀는 흑흑 소리 죽여 흐느꼈다. 그러나 잠시 후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소녀의 시선은 놀랍게 빛났다. 낯선 이 청년의 두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민은 소녀에게 자기의 눈물을 뵈지 않으려고 약간 시선을 밑으로 떨구었다.

“그래 의사가 왔었소?”

민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소녀는 말을 잊어버린 듯이 의아한 시선으로 다만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민은 포켓에서 돈을 꺼내어 소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소녀의 손은 차돌처럼 싸늘히 식어 있었다. 소녀는 너무 뜻밖의 일이라 아무런 반응도 없이 다만 그가 쥐어주는 돈을 그대로 받아들고 마치 넋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섰을 뿐이었다. 그는 너무도 가슴이 벅차서 그대로 돌아섰다. 소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몸을 움직거렸다.

“저, 누구신지……”

그는 대답 없이 소녀를 잠시 돌아보았다.

“오빠는 곧 돌아올 거요. 안심하고 어머님 잘 돌보고 있어요.”

그러고 나서 그는 가볍게 머리를 한 번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소녀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229~231쪽)


돌아서는 ‘민’에게 세모진 얼굴은 총을 겨누었다. ‘민’이 자수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의사를 밝혔고 변절과 같은 의미의 결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세모진 얼굴은 권총을 빼들었다. 그럼에도 ‘민’은 한 점 표정의 동요도 없이 침착한 태도로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한강로 쪽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비가 막 쏟아지던 날 사무실 지하에서 배신자로 몰려 죽음의 경계에 놓인 동료를 떠올렸다. 모반을 끼고서만 이루어지는 정치적 결단은 결국 속임수이고 기만이라는 성토를 떠올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정적을 향해 총을 쏘고 돌아서며 자신의 안전을 위해 골목 안을 지나가던 청년을 마구잡이로 잡아 범인으로 몰고, 의식까지 불능케 만들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오랜 병환으로 돈을 구하러 간다고 거리에 나간 오빠는 무고하다고 울먹이는 소녀와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실신한 노모의 얼굴을 떠올렸다. 죄의식이 밀려오는 순간이고 자신의 행위에 환멸을 느끼는 순간이다.


‘내일의 화려한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 오늘 평범한 인간의 뺨을 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 ‘민’, ‘위대(?)한 하나의 일의 성공보다는 오히려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들이 하나라도 더 소중스로워졌다.’ 라고 말하는 ‘민’은 ‘집’으로 돌아간다. 오빠의 무죄를 울먹이며 호소하는 소녀와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실신한 노모가 있는 곳을 떠올린다. 오래간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마음에 잠긴다.


병원 앞, 세 시, 쏠 것 앞에 서 있는 청년 ‘박’의 소설 속 최후와 흑흑 소리 죽여 흐느끼는 소녀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마는 청년 ‘민’의 소설 속 최후는 작가 오상원의 것이 아니다. 소설을 필사하고 나름의 소견을 밝혀가는 중년 화정의 것도 아니다. 작가 오상원의 소설이 ‘박’이니 ‘김’이니 ‘민’이니 하는 식의 극히 제한적인 인물을 통해 해방 후 혼란을 거듭하는 한국 사회 전반을 비추어보려 했던 만큼 문학작품을 읽는 무명(無名)의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오늘날 인터넷 댓글에 달고 나오는 닉네임과는 다른 의미의 익명성으로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현실을 직시해볼 수 있도록 하는 장치, 그것은 한국전쟁 이후 쏟아져 나온 소설 전후소설이 갖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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