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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정 Dec 29. 2022

2화. 흑시은장갖은모잽이첨자도

제2부. 떠나가는 배 꿈꾸는 다락

  ‘아,……네가 어찌 이곳에…….’

  생각이 떠밀려온다.


  지난 늦봄 단옷날 어머니 이 씨 부인은 며느리들과 고명딸 소희에게 특별한 선물을 내렸다. 사대부가의 여인이라면 향낭에 노리개를 매단 은장도 한 벌쯤 누구나 지녔을 것인데도, 어머니 이 씨 부인은 며느리들과 고명딸 소희에게 새롭게 제작한 삼작노리개와 향낭 그리고 은장도를 반드시 몸에 지니라는 말씀과 함께 선물로 내렸다. 단옷날 세시풍속에 특별히 있는 항목은 아니었으나 창포를 삶아 우려낸 물에 머리를 감고 다과를 먹는 자리에서 각기 맞춤한 것들을 고르게 했다. 친정에서부터 몸에 지녀왔던 것들을 견주어 가며 옛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방 안은 그리움에 눈물짓는 소리와 고운 빛깔의 은은한 자태를 보는 눈동자들이 소담하게 피워내는 웃음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창호지 밖에서 일렁이는 햇살까지 들여와 훈훈했던 기억이 저 끄트머리 어디쯤에서 밀려온다. 

  “어머니……, 오늘처럼 참담한 아침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곧 섣달이 다가서는 날 아침에 단옷날 하얀 이 고르게 보이며 함박웃음을 짓던 어머니를 부른다. 꿈속이 아닌 들 대답이 있을 리 없고, 꿈이어도 깨고 나면 허무하게 스러져갈 모습이 대답해줄 리 없다. 그런데도 명치끝 아리게 부르는 것은 그 태(胎) 안에서 열 달을 머물다 세상 밖으로 나온 인연이 기억 속 어딘가에 떨군 탯줄, 그 짧은 끈의 당김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와 나 사이를 묶은 끈이라기엔 배꼽 끝에 달려 있다가 도르르 말려서 꼬들꼬들해진 채로 툭 떨어진, 마치 바짝 마른 수박꼭지처럼 생긴 것이 배배 꼬아진 그 끈이 오늘 이 아침에 불러지는 것이다. 

  시어머니 최 씨 부인이 소희 앞으로 은근히 밀어놓고 갔던 장도를 서운이가 치운다는 것이 얼른 손에 닿는 대로 경대 서랍에 넣었던 모양인데, 

  턱, 턱거리다가 끌려 나온 것이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장도다. 

  멀리 전주의 용머리고개 근처에 산다는 대장장이 털보에게서 특별히 주문해 만들어 온 것이다. 평상시에는 삽이나 괭이, 호미, 낫 같은 농기구를 만들어 밥벌이를 하다가도 사대부가나 부잣집에서 혼사가 있거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어 따로이 주문을 해오면 여러 날을 공들여 만들어낸다는 솜씨 좋은 장인이라고 이름이 나 있었다. 전주의 비경 완산칠봉 아래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털보가 장도를 만들 때 뿜어내는 숨소리는 불에 달구어진 쇠를 두드리는 망치소리에 섞여 들어 거대한 몸뚱어리를 틀고 앉아 잠들어 있는 용을 깨운다는 말들이 소문으로 퍼져, 호남 지방의 사람들은 거리를 재지 않고 와서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열망, 

  사람들의 열망은 끝이 없다. 수백 대를 거쳐 와서 수백 대를 거쳐 가도 사람들의 열망은 식지 않는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쇠뭉치도 털보의 손에 이끌려 지글지글 타는 용광로에 들어가 끓어 넘치는 고통을 받고, 차가운 물속에 곤두박질치는 수모를 겪다가 곤지산 전부를 꽝 꽝 울리는 망치를 호되게 맞고 나면 한 편은 부드러워지고 한 편은 단단해진다. 그래서 괭이도 되고 낫도 되어 땅을 일구고 곡식을 거두어 사람을 살리고 소도 살리고 돼지도 살린다. 

  쇠뭉치, 그것에게 무슨 열망이 있고, 무슨 바람이 있었으랴. 태초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사람들에게 붙잡히어 사람들이 피워내는 갖가지 열망을 채워주는 덩어리가 되었을 뿐이다. 어떤 형체도 갖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저 흙속에 섞여 들어 있었을 뿐이고, 강이나 냇가의 바닥에 박혀 있는 돌 틈에서 물살을 헤치며 춤을 추는 연어 떼들과 붕어 떼들, 송사리 떼들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형체 없는 부유물일 뿐이었다. 

  그런 것들이 가늘고 촘촘한 체에 흙조차 돌부스러기조차 한데 엉겨 이리저리 치이다가 불 속에도 들어가고, 물속에도 들어가고, 망치 아래로도 들어가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새로운 그 무엇으로 태어난 것이다. 삽으로도 괭이로도 태어나고, 갖가지 장식물로 태어나 장 · 농 · 경대의 나비도 되고 박쥐도 되어 죽지 않는 생애를 거듭한다. 경첩 · 문고리 · 돌쩌귀로 태어나 사시사철 여닫는 문을 지탱해주며 수수한 생애를 저항 없이 살고, 곳간의 자물쇠통으로 태어나 일생을 여닫히며 굳건하게 지키는 삶을 투쟁 없이 살아간다. 

  그래도 다행이라 여기는 삶의 자락이 있다. 어떤 놈들은 긴 칼로 태어나고 짧은 칼로 태어나 베고 자르고, 튕겨 오르는 핏살을 허공에 뿌리는 삶을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멀리서도 방아쇠를 당기면 조그맣고 단단한 둥근 알을 튕겨내어 마주 선 사람의,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가슴을 꿰뚫는 삶을 무덤덤하게 살아내야 한다. 이런 놈들의 삶처럼 살지 않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쳐들어오는 적군들의 말발굽소리에 치를 떨며 달려 나가 온몸으로 막아내는 결사항전의 용맹이 사람들의 입과 입 사이를 오르내리며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해 주겠지만, 그래도 몇 백 년을 두고 몇 천 년을 두어도 가시지 않는 피의 비린내를, 그 역겨움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쇠, 그것의 운명인가, 숙명인가. 수천만 번의 비가 내리고, 낙숫물이 돌을 뚫어도 씻겨나가기는커녕 그 더께만 더해가는 죄의 울림은 아, 쇠의 열망이었구나. 

  은을 입은 장도의 끝이 날카롭다. 어머니의 향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잽이장도의 팔각이 손안에 뿌듯이 잡혀온다. 

  결행을 생각하는 시각. 

  만약 모잽이장도 팔각 끝을 움푹 파고들어 가 송진에 발목 잡힌 칼날의 끝이 소희의 가슴을 파고들거나 소희의 배 부분 어딘가를 파고들어 깊숙한 곳에 닿으면 열망은, 아주 오래된 열망의 폐습(弊習)은 한 여인의 죽음을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의 삶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붉은빛으로 곧게 선 창살들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목에 서서 의연한 기상으로 추상같은 가르침을 내릴 것이다. 먼저 간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모, 그 정을 가눌 길 없어 의연히 자신의 몸을 가르며 가노라 먹을 갈고 붓을 적셔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순간들의 떨림은, 순백의 종이에 맺히는 눈물의 통한, 그 비통함은 오롯이 영광을 꿈꾸는 자들의 것이지 폐습에 살해당하는 여인의 것이 아니다. 


  “헤헤, 큰마님, 거, 애기씨께서 고르신 장도는 말입죠, 먹감나무로 만들었습니다요.”

  “으음? 먹감나무로 만들었다고?”

  “예. 그렇습니다요. 헤헤, 거 먹감나무라는 것이 본래, 에, 거어 고욤나무에다가 감나무를 접목시켜갖고 키워낸 것인디요, 차암 오랜 세월을 살아낸 나뭅니다요. 이 나무를 그냥 흙속에 파악 묻어놓고는 한 삼사십 년 너끈히 감을, 거 시커먼 감 말인디요, 그놈을 따서는 그냥 먹기도 하고, 곶감을 깎기도 허는디요, 내가 언지 너를 알고 지냈드냐 싶게 둥치를 싸악 비어냅니다요. 그리갖고는 한 석 달이나 되게 물에다 담궈 놓습니다요. 왜냐면 나무 안에 찐득하게 들어 있는 찐을 빼야 되거등요.”

  넓적한 낯바닥에 광대뼈가 불쑥 솟아올라 펑퍼짐한 얼굴에 제법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다. 웃을 때마다 짙은 눈썹이 갈매기처럼 웃고 덥수룩한 털에 가린 두툼한 입술이 사람 좋은 모습으로 웃는데,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을 때는 입 모양도 하회탈처럼 벙그러지는 것이 더없이 선해 보인다. 그런 사람이 손짓을 해가며 허풍을 떠는 양으로 말을 벌인다. 

  “그리여. 그런디, 그렇게 나무를 오랫동안 물에 담궈 놓으면 나무가 썩지 않았겠는가?”

  “아, 예. 근디 그것이 차암 묘헌 것이요, 껍질은 썩기도 허는디 안에 있는 흑시는 안 썩는구만요. 긍께 거어 나무 자체가 고욤나무허고 감나무 놈이 훌레를 붙어갖고 먹감나무가 된 것인디, 본래 고욤은 나이를 먹어감스로 줄기가 흑갈색으로 변해가는디, 긍게 거 머시냐 거시기, 거어, 거북이 등짝맹이로 쩍쩍 갈라지능마요. 근디 그것이 붙어서 하나가 되갖고는 흑시(黑柹)를 배는디, 말허자먼 흑시가 고욤허고 감나무의 자식놈인디요, 물에다가 그냥 석 달 열흘을 담과 놔도 이놈이 안 썩어요. 사람 같으먼 묵지근헌 것이 고집도 징허게 시고, 의지가 대단헌 놈인 것이지요. 그런 놈이라면 지가 무엇을 허든 작정을 허고 나스먼  못헐 것이 없겄고, 잘 가르쳐노먼 충신이고 효자고 안되겄능가요? 참말로 진국입지요.

  “으음, 그렇구먼. 그런데 장도가 오래도록 지녀도 틀어지거나 날이 빠지거나 하는 일은 없겠는가? 감나무가 그리 단단할까?”

  “아믄요. 그렇고말고요. 먹감나무라고 해서 모든 나무에 흑시가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요. 사람도 자식을 풍풍 낳는 사람도 있지만 평생을 가도 못 낳는 사람이 있능거맹이구마요. 흑시가 들어 있다는 것은 나무통 안에 나무가 하나 더 들어 있다는 말이거등요. 어떤 놈은 파도가 굼실거리는 바다를 힘차게 달리는 말의 모양으로 들어가 있고, 어떤 놈은 모가지가 긴 사슴  한 마리가 높이 솟구쳐 서 있는 모양으로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요. 개중에 어떤 놈들은 부처님을 가운데 모시고 양 옆으로 앉은 협시보살들이 기거하는 대웅전 앞의 서까래를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이 틀어잡고 놔주지 않는 기둥에 새겨진 세월이 그대로 찍혀 있구만요. 그런 놈들을 활비비로 푸르륵 뚫어봐가지고 흑시가 까뭏게 들어백힌 놈들로만 일을 하능구만요. 긍께로 나무의 근본은 물을 것도 없는디요, 이놈을 물에서 건져갖고는 말리는구만요. 말린다고 햇볕을 쬐믄 절대로 안되고요, 다 마를 때까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늘에서 말리는구마요. 날이 따숩고 바람이 잘 들먼 쉬이 마르겄지만……, 어쩠든지, 반닫이를 만들건 삼층장을 만들건, 요렇게 작으면서도 고급스런 장도를 만들든지간에 시나브로 날이 가고 달이 차야 마릉께, 시간이나 정성이 말로는 다 헐 수 없는 물건이구마요.”

  힘주어 말을 할 때면 콧잔등을 찡긋거리기도 하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코밑을 문질러 가면서 쓰읍 크흡 콧물 들이키는 소리를 내곤 하던 털보의 입술 언저리에 삐져나온 침이 한데 엉겨 보글거린다. 게접스러운 데가 있어 보인다. 

  “그래. 고생이 많았네. 오랜 시간 정성 들여 만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네. 내 서운치 않게 답례를 해줌세. 서운이네, 식혜 한 사발 더 담아주게.”

  “뭐,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헤헤, 감사하구만이요. 고생이랄 것은 없는디, 그리도 뉘 댁 일리라고 소홀히 했겠습니까요. 할 수 있는 대로는 다 해봤구만요.”

  서운이네가 가득 담아주는 식혜 사발을 손으로 매만지며 헤헤 벙그러지는 웃음을 웃는다. 

  “작은애기씨 장도에는 ‘흑시은장갖은모잽이도’ 라는 이름을 붙이면 될 것 같습니다요. 거기다가 은으로 젓가락을 만들어 붙이고 나비까지 붙잡아 얹어놨으니, ‘흑시은장갖은모잽이첨자도’라는 이름까지도 붙여볼 수 있겠구만요.”

  키는 별반 크지 않으나 어깨가 떡 벌어져 기운깨나 쓰게 생긴 털보가 뒤로 질끈 묶어 놓은 머리뭉치를 매만진다. 그리고는 두꺼비등짝 같은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마로 가져가더니  쓸어내린다. 그 손가락 사이로 비쳐드는 여린 햇살에 하늘거리는 털 오라기들이 잡혔다 풀려나온다. 쑥스러운가 보다.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눈으로 방바닥을 훑으며 헤헤거린다. 어, 저기 지네가, 말을 뱉으려다 참아내고는 식혜를 마신다. 어딘지 가벼운듯하면서도 자기 일에 대해서만큼은 눈을 빛낼 줄 아는 장인다운 아집 같은 것이 있어 보인다.  

   

  그것이 엊그제 일이었던 것처럼 되살아난다. 

  ‘아, 그곳으로 가고 싶어라. 내 어머니의 인정이 대청마루에 따사로이 퍼지던 그곳으로 가고 싶어라.’

  손에서 맥이 풀린다. 어쩔 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오며 어깨가 내려앉고 윗배가 아랫배를 누른다. 내려앉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고인다.

  ‘어찌 해야 하는가. 어머님은 진정 결행을 소망하시는가.’

  ‘지난 단옷날 경건한 마음속에서 빛나게 아름다웠던 장도의 기원이 이런 것이었던가.’

  ‘부질없다.’

  ‘이토록 부질없는 것을 그토록…….’

  ‘내게 무슨 잘못이 있었더란 말인가.’     


  그러나 끝내 장도의 끝은 소희의 가슴을 찌르지 않는다. 늦가을 서리 내리는 마당에 국화만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 을씨년스럽던 계절을 어찌 보냈었던가. 꿈만 같던 그 아득한 시간들 속에서 소리 없이 다가서는 시어머니 최 씨 부인의 차가운 눈초리는 언제나 묻는 낯빛이었다.

  “네 저고리 속 깃에는 아녀자의 도리가 없더냐?” 

  “…….”

  “너희 친정에서는 고명딸이라고 부녀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더란 말이냐?” 

  “…….”

  “고리짝 가득 싣고 온 저 책들은 다 무엇에 쓰는 물건이더냐?” 

  “…….”

  소리도 없이 다가서는 그 물음이 바뀌어가는 계절의 바람만큼이나 시리게 와서 박히곤 했었다. 삭전(朔奠)과 망참(望參)의 예라. 매월 초하룻날 아침이면 제사를 지내고는 곡(哭)을 올리고, 매월 보름날이면 사당 앞에 분향하고 참담한 심정을 가눌 길 없으나 죽을 수조차 없는 지극 통절한 마음을 담아 곡(哭)을 올린다. 가슴속 아린 슬픔에 소희의 하얀 손이 때때로 시리고 욱신거리며 도르르 말렸다 도르르 펴지는 불편함이 마음에 걸려도 받아줄 이 없는 적막한 시간들, 그녀의 방 이부자리는 떠나간 자리였다.     

 

  떠나간 자리, 

  언약은 어버이들의 깊은 우정에서 비롯된 것들이었으나 이별은 도영과 소희 두 사람의 것이 되고 말았다. 섣달로 기우는 동짓달의 깊은 밤, 담을 넘은 자들의 실패한 거사는 침묵 속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어오던 아주 오래된 열망의 폐습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겨 주었다. 보이지 않는 가면, 그 가면 안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던 정제되지 않은 의식의 언어들과 행위들, 그것들 앞에 홀로 남겨진 여자는 이미 한 마리의 슬픈 울음을 우는 산짐승, 나약한 한 마리 산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나 사냥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고요하다. 숨을 죽이고 발끝 소리를 눌러가며 조여 오는 숨 막히는 포획의 욕구들, 그것을 산짐승은 알지 못한다. 자신의 몸뚱이를 덮쳐 가두고는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뜯을 사냥꾼들이 매복하고 있는 숲은 태곳적 원시림의 그것처럼 고요하고 적막하다. 멀리서 울려오던 늑대의 소리가 언제쯤인지 모르게 멎어 있고,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며 지저귀던 새들의 소리도 순간 멎는다. 진공의 상태, 일시 정지한 시간, 샘물에 비친 산짐승은 노루일까, 고라니일까. 자신이 쓰고 있는 허물, 그것의 껍데기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고, 막 떨어져 물 가운데를 서성이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넌 누구니?” 물을 때, 사람, 사냥꾼의 번뜩이는 눈빛이 노리는 급박한 시각의 조임을 알 리 없는 산짐승은 쥐어짜는 소리를 듣는다. ‘끄으애액 끄으애액’ 높다란 참나무 늙은 가지 어디쯤에서 숨죽이고 있던 청설모가 진공의 상태, 일시 정지한 시간의 벽을 뜯는 소리를 듣는다. 

  자각, 

  허무한 자각. 

  까만 동공을 들어 청설모를 올려다보려는 순간 온몸으로 퍼지는 촉수의 떨림을 느낀다. 유쾌하게 흐르던 물살이 영하의 칼바람을 맞고 밤새 어지럽게 휘날리던 눈발에 얽히어 속수무책으로 결빙(結氷) 되고 마는 혹한(酷寒)의 살(煞)처럼 굳는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겁박의 시련, 보이지 않는 가면 속에서 쉴 새 없이 만들어지는 갖가지 음흉한 흉계와 모략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열여덟 청상은 산머루빛 눈물을 떨구며 경대를 벽으로 밀어놓는다.    

 

*대문사진: 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2대 장도장 박종군 관장입니다.(광양장도박물관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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