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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정 Mar 15. 2023

사름에 기대어

제3부. 기다리는 여심, 환생

  작년 가을에 거두어들인 씨앗은 겨울을 났습니다. 봉지에 담겨서 다락의 선반에 매달려 겨울을 났습니다. 누런 껍질에 싸인 채 깊은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던 시간들, 깊은 침묵의 시간을 거두는 손길이 있습니다. 그 손길은 오랜 세월 동안 논 몇 뙈기와 밭 몇 마지기에 기대어 식솔을 거느려왔습니다. 가난한 농부 김 영감에게는 아들들이 있었고, 딸이 있었습니다. 자라나는 자식들을 든든하게 공부시켜 출세길로 들어서게 하겠다는 야무진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루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김 영감은 국민학교조차 들어서지 못했고,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적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봄으로 들어설 무렵이면 김 영감은 아껴둔, 묶어둔 봉지를 꺼내어 깊이 잠든 볍씨를 털어내고 물에 담그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섯 살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세 살 난 여동생을 데리고 개가하신 어머니의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며 ‘엄마’라고 부르는 것조차 망설이다 돌아서곤 했던 김 영감의 막내며느리 장 영감의 막내딸은 볍씨를 꺼내 커다란 통에 담그며 약을 치던 시아버지 김 영감이 왜 그렇게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시아버지보다 훨씬 큰 살림살이를 이끌고 자식들도 자기들이 하려 하는 한 끝까지 가르쳐보고자 열망했던 친정아버지 장 영감은 보여주지 않았던 과정을 시집을 와서야 대학까지 나왔다며 자랑하고 다니던 막내며느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는 마당에서 비로소 보았습니다. 

   볍씨를 약을 쳐서 소독을 하지 않으면 키다리병에 걸려 쓸데없이 웃자라버린다고, 그러면 벼농사를 망치게 된다고 하셨던가 말았던가 그조차 가물가물한데……, 어쩌다 오늘 자꾸 떠오릅니다. 다섯 살 난 큰아들과 세 살 난 둘째 아들이 고무함지박에 들어앉아 한 놈은 끌고 한 놈은 질질 끌리는 통에 쿵쿵거리며 웃어재끼던 그 맑던 날의 하늘빛이 자꾸 떠오릅니다.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 것일까. 잘 모르겠는데, ‘사리다’ ‘사려두다’를 찾으려다 우연히 보게 된 ‘사름’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스물다섯 해 전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말았습니다. 

   ‘사름’은 모를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 심은 지 나흘 닷새가 지난 후 모가 완전히 뿌리를 내려 푸른빛을 생생하게 띠는 일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볍씨가 싹을 틔우고, 싹튼 볍씨를 흙으로 다져놓은 모판에 뿌려서 흙을 덮어두고 어느 만큼이 지나면 모가 나오는 과정, 그 과정이 지난 후 다 자라면 논으로 옮겨 심는 모내기가 이루어지고, 그 모가 옮겨 심은 논에서 나흘 밤과 닷새 낮을 지나면서 제자리를 잡고 푸른 잎 성성하게 돋보이는 날의 모습을 옛사람들은 ‘사름’이라고 일컬었다 합니다. 


   화정 장인우의 장편소설 『해원』이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대단원의 막을 열어야 하는 시간. 그런데 어쩐지 무언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무엇이 빠졌을까? 어찌하여 정읍네 소희의 영롱하게 빛나는 가마 상여는 뜨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아쉬워 화정이를 붙잡고 뜨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둘러보았습니다. 

   ‘사름’을 새기라 합니다. ‘사름’에 기대어 생각을 더하고 고민을 더하라 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 합니다. ‘용두사미’가 되지 말라 하십니다.      


   오늘과 내일은 쉬겠습니다. 다시 진도로 내려가 진도 만가와 진도 다시래기, 그리고 김내식 님의 북춤을, 세한대학교 이동주 교수님의 소고놀이를 다시 보고 살펴서 다음 주 수요일과 목요일에 대단원의 막을 열겠습니다.      

   고집이 센 어르신 인동 장 씨 장소희(수희)님의 삶을 잘 갈무리해 오겠습니다. 

   다음 주에 우리 다시 만나요.     

                         2023년 3월 15일 화정 장 인 우 올림 


*대문사진: 이동주 소고놀이(채상소고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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