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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Apr 08. 2023

고양이 스타일과 강아지 스타일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2023년 현재 코로나가 종식되어 간다.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일단 매스컴의 관심도 멀어졌고 백신 맞으라는 강요도 없으니까. 그러나 거기서 파생된 생활방식의 변화는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비대면 사회에다 온라인으로 급격한 변화가 가장 눈에 띈다. 우리는 카이사르처럼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시대에 맞는 라이프스타일의 옷을 입고 적응력을 키워 나가야 함은 필수다.


개와 고양이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들의 생태계에서 이 시대의 생활방식과 롤 모델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동안 강제된 규범의 하나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있었다.

이건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1960년대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숨겨진 차원'이란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친밀한 거리다. 0 ~ 45cm의 공간에 들어올 수 있는 집단으로 연인이나 가족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개인적 거리다. 46 ~ 120cm로 친구나 지인이 해당된다.


셋째 사회적 거리로 1.2m ~ 3.6m에 해당되는 공간으로 사적 사이가 아닌 공적 관계 사회적 관계로 연결되는 영역을 말한다. 넷째는 공적 거리다. 3.6m 이상에 해당하는 거리로 상호 연결 관계가 불가능한 강사와 청중 사이의 거리를 두는 영역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영향


인간관계를 거리의 영역에 가두고 측정하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닐지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몇 미터의 간격을 두고 있는 걸까.


에드워드 홀의 이론에서 파생된 사회적 거리는 사생활 개입이 허락되지 않는 말 그대로 사회적 거리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하는 게 아닌 비대면의 공간을 말한다. 거의 소 닭 보듯 하고 사는 수준이다.


굳이 친밀하게 지낼 필요도 없다. 이런 거리 두기는 적지 않은 심리적 박탈감을 가져온다.  사람에게 만남과 접촉이란 본능적인 일인데 그것이 차단되었을 때 느끼는 공황상태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코로나 이후 가장 붐비는 진료센터는 신경정신과다. 우울증 때문이란다. 우울증은 포스트 코로나가 남긴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주홍글씨가 되었다.


이 시대를 사는 이들은 불편한 사람과 만나서 소통하는 대신 단절을 택한다. 그런 사람과의 대화 자체를 스트레스로 생각하는 거다.


사사건건 반말해 대며 팥쥐 엄마가 쥐 들볶듯 시어머니 같은 잔소리나 퍼붓는 직장 상사를 늘 가까이해야 한다면,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편드는 시누이가 더 밉다 했는데 그런 상사에게 아부하는 얄미운 직장 시누이를 계속 대면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마음속엔 분노의 가시가 돋아나고  불끈 쥔 손엔 사표를 들고 있다. 하지만 얼굴은 봄날의 벚꽃 같은 미소를 띠고 있어야 한다. 먹 살아야 하니까. 아 삶의 모순이여.


알고 보면 우리도 타고난 페르소나를 가진 위대한 연극인들이다. 어쨌거나 이러면서 하루 이틀이 지나가고 계절이 바뀌고 또 한 번의 봄날은 간다.


         포스트 코로나와 가정의 풍속도


시대가 달라지면서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풍속도는 멀리서 찾을 것 없다.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오프라인 근무에서 온라인 재택근무로의 이동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다.


사회적 무게중심이 가정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은퇴연령은 더욱 낮아지고 백세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난리 북새통이다.


노년이 되려면 까치설날 수십 번은 더 찾아 잡숴야 할 만큼 번드한 남성들이 가정으로 대거 유입되고 있다. 21세기형 엑소더스가 일어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남자의 삼식이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이다. 물론 삼식이들을 환영하는 안방마님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게 문제지만.


여기서 공간확보의 전쟁이 가정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 일어남은 예고된 일이다.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장소 지향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장소와 공간을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위대한 우리 삼식이 님들이 이를 알 턱이 없다.


안방과 주방 등의 영역은 여성만의 고유 지정석이었다.

이는 신성불가침한 법규와 같다. 여성이 아닌 남성이 주방을 차지하는 순간 그는 졸지에 영역수탈자로 수배되어 불가촉천민집단으로 강등당하게 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전방위적으로 실행되는 거다.


생각해 보라.

남편 출근 이후 여성들의 모든 수다는 이토록 신성한 고유영역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 공간이야말로 여성의 삶 자체요 기쁨이자 에너지 충전의 발전소였다.


이토록 고유한 자기 영역을 삼식이가 꿰차기 시작했다. 온종일 나가지도 않고 침대에서 출근한 후 소파에서 퇴근하는 살풍경을 눈뜨고만  보고 있겠는가.


사회적 거리 두기 삼 단계에서 갑자기 일 단계로 축소되어 버린 것이다. 영역의 축소는 개인적으로는 갈등이요 사회적으로는 분쟁이며 국가적으로는 전쟁을 일으킨다.


밖으로만 돌아 살던 이 땅의 삼식이 님들이 그토록 심오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급의 진리(?)를 알 턱이 있을까.


하지만 그들에겐 열심히 산 것 말고 아무 죄가 없다. 있다면 코로나에게 있겠지. 문제는 고유의 공간을 점령당한 여성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란 데 있다. 또 하나의 돌발적 위기가 들어온 것이다. 합리적 방식을 통해 조정하지 않으면 황혼이혼으로 가는 고속열차에 올라탈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스타일의 개와 고양이


개와 고양이는 여러 면에서 성격이 다르다.

개는 관계 지향형 동물이다. 녀석에게 환경이나 장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주인이 부자면 개도 부자로 살지만 노숙자라면 개도 노숙자가 된다.


개는 금수저 집안에 입양 안된 걸 탓하지 않는다. 주인의 학벌이나 미모 경제력 심지어 그의 인품 따위를 빌미 삼아 불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개가 있다고 연구기관에 보고된 바는 아직까지 없으니까.


녀석들은 주인과의 끈끈한 관계를 중시한다.

다른 집에 팔려나간 개가 수개월 만에 돌아왔다는 뉴스를 접하고 누구나 감동한다. 분명 사람보다 나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세상만사 다 그렇듯 빛 뒤에는 어둠이 꼭꼭 숨어 있는 법. 개는 주인이 일일이 챙겨 주어야 하는 성가신 존재다. 이것이 관계 지향형 성격을 가진 동물인 개의 약점이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어떨까.

놈은 관계 지향형이 아닌 장소 지향형 스타일이다. 주인과의 끈끈한 관계보다는 자신이 머무는 영역을 훨씬 중요시하는 캐릭터다. 이 점이 고양잇과 동물의 주된 특징이다.


고양이의 큰 형님 호랑이도 마찬가지다. 요놈들은 주인과 헤어져도 자기가 살던 장소를 고집한다. 개는 사망한 주인의 무덤가를 맴돌며 애처로운 장송곡을 부르는 가수이기도 하다.


집을 잃고 떠났다가 주인 찾아 삼만 리 여행을 거듭한 후 집에 돌아왔다는 눈물겨운 드라마의 주인공은 언제나 개였지 고양이는 아니다.


고양이는 개한테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매력 지니고 있다.

녀석은 뭐든지 혼자 알아서 다 한다. 일생 동안 한 번도 씻지 않고 사는 개와는 다르다. 주인 없이 떠도는 개들의 추한 몰골을 보시라. 개는 주인이 씻기지 않으면 양아치 꼴을 면키 어려운 짐승이다.


녀석은 외출할 때도 주인과 함께 해야 할 만큼 귀찮은 존재다. 이걸 자주 생략하면 우울증에 걸린 개가 되어 장기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점이 주인을 불안케 하는 거란다.


고양이는 이와 다르다. 주인 없어도 혼자 챙겨 먹고 세수도 잘하고 몸을 씻을 줄도 안다. 놈들의 외모를 보면 깔끔한 데다 제법 운치도 있어 보인다. 봄날의 햇살 아래 망중한을 즐기는 고양이를 보라. 선이 가늘고 날렵한 동양미인처럼 요염하다.


    

          새 시대의 트렌드 고양이 스타일


고양이는 사람이 신경 쓸 게 별로 없어 보인다.

혼자서 척척 잘하니까 말이다. 고양이 세수는 있어도 개 세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 개와 고양이를 갈라 편애하자는 게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뭐.


개나 고양이 모두 가슴 아픈 흑 역사를 가지고 있긴 하지. 개는 먼 조상 때부터 내려온 보신탕 공포감이 유전자에 깊이 각인되어 살고 있다. 저 멀리 지나가는 개장수 모습만 봐도 오줌부터 지린다.


고양이 역시 영화 '검은 고양이'에서 비롯된 인간의 부정적 인식이 워낙 강해 억울한 트라우마를 벗겨내지 못하고 사는 실정이다. 하여간 사람이나 동물이나 죄다 한 세상 살기 참 어렵다.


 현재 우리의 상황은 개가 아닌 고양이 스타일을 강요하고 있다.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거다. 생래적으로 남성은 강아지 스타일, 여성은 고양이 스타일에 가까운 것 같다.


 가정에서 식사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고 늘 아내에게 의존해 사는 남성들은 퇴직과 함께 집안에서 많은 갈등을 일으키기 쉽다.


외출하는 아내를 향해 "어디 가 언제 들어와"라고 말하면 대답 대신 일주일 분량의 설렁탕 국물이 기다릴 수 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으나 씁쓸한 가정 풍속도다.


코로나 이후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생활방식의 전면적 개혁일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살라는 것. 시대적 메시지이자 소명처럼 들린다.


고양이한테 가서 배워야 할 차례다.  아내를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강아지 스타일의 남편과 자신만의 장소를 중요시하는 고양이 스타일의 아내 사이에 충돌이 자명해진 이 시대. 변화는 여러 방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같이 사회적 거리 두기는 가정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건 더 있다.

강아지 스타일의 생활방식은 유통기한이 지났어도 한참 지났다는 거다. 이미 폐기처분 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인간이 대단히 지혜로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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