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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May 12. 2023

작약꽃 이야기, 이등이라 말하지 마오.

                       꽃의 세계에도 서열이?


모란이 꽃의 왕이라면 작약은 꽃의 재상이다.

꽃의 나라에서 모란이 왕노릇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게 진실이라면 작약은 이인자다. 물론 인간들이 만든 억측에 불과하지만.


작약이 모란과 나란히 서기는 어려울 게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으니까. 서 있으면 작약, 앉으면 모란, 걸으면 백합이란 말도 있다. 죄다 미인을 상징하는 뜻으로 쓰인단다.



꽃들이 뭘 알겠는가. 서열을 정하고 그걸 유쾌 통쾌 즐기고 있다. 인간들 말이다. 모란과 작약의 심기를 잔뜩 건들면서.


 사람은 비교하기 좋아한다. 본성이 그런 것 같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뻐? 이 물음은 백설공주의 한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다.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이것도 매 한 가지. 가만 놔두면 잘 먹고 잘 살 두 맹수에게 왜 싸움을 붙여 사달을 낼까.


꽃들이 이런 걸 알 턱이 있나. 아니 아무 관심도 없다. 그저 때가 이르면 꽃을 피운다. 자기 역할을 다한 후 지면 그만이다.


작약꽃은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할 만큼 역사가 깊은 식물이다. 동서양 할 것 없이 주로 약재로 쓰였다. 그 이후 관상용 꽃으로 변신해서 사람과 더욱 친숙하게 되었다.


 작약은 중국에서 널리 알려진 꽃인데 우리말로는 함박꽃이라 부른다. 대체로 깊은 산속에 자생하는 꽃이었다.


 작약은 외관상 가냘프고 맵시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르기 어려운 작약보다는 함박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작약이 우리 역사 문헌에 첫 선을 보인 시기는 고려 의종 때로 추측된다.


아양 떠는 고운 자태

너무도 아리따워

사람들은 이를 두고

절세미인이라 한다네

이슬 젖은 꽃 기울면

바람이 들어주니

오나라 궁궐에서 춤추던 때

비슷해라.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

                        

                   

                            작약꽃에 얽힌 히스토리


작약은 고려 충렬왕 때에 이르러 더욱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만인의 가슴을 게 만든 슬픈 로맨스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공주와 고려 공민왕은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다. 그런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있었을까. 무슨 말씀. 너무 뜨거워서 데일 정도였단다.


남편과의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향수병인지 모른다. 먼 타국에 와서 겪었을 노국공주의 맘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은 간다.


 때는 오월이었다. 하루는 공주가 궁궐을 산책하다가 작약이 탐스럽게 핀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참 동안 꽃에 몰입하던 원나라 공주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그 후에 시름시름 앓더니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체 도화살 말고 작약살이라도 들어 죽었단 말인가.


인생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아름다운 꽃밭에는 언제나 독사가 있지 않은가. 그녀의 한 많은 생애가 작약꽃 속에 깃든 것 같다.


아내를 잃은 공민왕은 정신병지 결렸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랑도 과유불급이라! 이런 말이 가능할까 마는. 아 가련한 공민왕이여!


공주의 묘지명에 글귀를 새긴다면 다음 구절이 딱 어울릴 것이다.


이승이 모두 한 바탕

꿈과 같고 물거품 같도다

마치 이슬이나 잠깐 반짝이다

없어지는 번개와도 같은 것

인생살이 이와 같이 여겨야 마땅하리.

            금강경


작약꽃은 모래 같은 흙을 좋아한다. 천성이 그렇다. 작약 감상은 언제가 좋을까. 이슬이 맺혀 무르익는 시간,  서늘한 새벽이 으뜸이다.


바람이 향기롭게 움직이는 고요한 한낮그 다음이다. 일찍이 개성이 낳은 어떤 시인은 그 광경을 이렇게 읊고 있다.


향풍에 대낮은 고요도 한데

이슬은 새벽녘 서늘도 해라.

    구한말 김 택 영 시인

                               

                    

                            작약꽃과 다산 정약용


작약을 말할 때 비켜갈 수 없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국화와 작약꽃을 유달리 좋아했다.


강진 유배 당시 그는 자신이 거처하던 다산초당에 백 여그루의 작약꽃을 심어 놓았다.


작약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인생에 빗대는 에세이를 남겨 놓았다.


바야흐로 작약의 새싹이 성난 듯 올라올 때는 기세가 대단하여 돌이라도 뚫을 것 같다.


붉기는 마치 떠오르는 해와 같고 날카롭기는 창끝과 같다. 이는 한림과 직각에 있던 때라 하겠다.


이윽고 잎을 펴고 가지를 뻗어 기쁜 듯 이들이 들하고 아리땁게 여릿여릿하니 이것은 옥당과 은대의 시절이라.


 그러다가 꽃망울이 부풀어 가지마다 맺히고 꽃받침이 꽃망울을 감싸면 지나던 개미가 그 진액을 빨아먹는 것을 그만두고 들르던 나비도 그 향기를 맡지 않는다.  


멀리서 바라보면 갑작스레 독이 있는 것 같고 만져보년 억세서 부서뜨리기가 어렵다. 이것은 직제학과 도승지의 시절이다.


마침내 붉은 꽃을 토해내어 불구슬이 빛을 발하고 첩첩이 엇갈려 쌓인 잎새는 수놓은 비단 같아 짙은 향기가 방안까지 들어온다.


이것은 작약이 가장 절정을 이루는 때니 대제학과 이조판서의 시절이라 하겠다.


이를 지나고 나서는 내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겠다. 쇠락한 형상이 나날이 드러나고 추한 자태가 말로 펼쳐진다.


깨를 축 늘이고 날개를 움츠린 것은 마치 화살에 맞은 새와 같다. 천지의 변함없는 이치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


인생의 영욕을 다 겪은 다산 정약용은 작약이 피고 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지나온 인생을 반추시키고 있다. 그는 작약꽃을 통해 인생의 깊은 진리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또한 작약꽃 한 송이와 다르지 않다. 귀인의 정원에서 정원사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피어나는 꽃이 있는 반면 깊은 산속에서 저만치 혼자 피었다가 사라지는 꽃도 있다.


꽃은 아무 불평이 없다. 꽃은 누가 알아주고 말고 가 없다.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그저 향기를 낼 뿐이다. 다만 그 꽃을 바라보는 인생들이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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