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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Apr 04. 2024

오늘의 인생문장

                다산의 마지막 말

"우리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지만

시대가 나를 휘감고 내가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삶에서 비겁해질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의 비겁함을 인정하고 화해하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진정한 어른됨이 무엇인지를 글로 남겼다. 죽음을 예감하여 묘비명에 들어갈 내용을 자신이 직접 썼다. 자찬묘비명이 그것이다.


권력의 무상함과 인간성의 민낯을 생생하게 경험한 한평생이었다. 이십 년 가까운 유배생활도 그의 몫이었다. 그러다가 육십을 맞이한 것이다.


고향집에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본다. 강진 유배기 간 중 독서와 글쓰기에 얼마나 진을 쏟았던가.


무릎관절의 뼈가 드러났다. 머리카락도 죄다 빠져버렸다. 중풍까지 찾아와 운신조차 어려워졌다. 예리한 세월의 광풍은 그의 얼굴을 비켜가지 않았다. 밭고랑처럼 깊은 주름은 그 흔적이 아니던가.


문득 어른의 모습을 띤 자화상이 나타났다. 다산이  발견한 어른이란 나이만 많은 사람이 아니다. 어른이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화해를 이룬 사람이다.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 보면 후회와 탄식이 가득하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이렇게 했더라면 오늘처럼 되지 않았을 텐데. 왜 난 더 잘하지 못했나. 시간은 강물처럼 빠르게 흘러 지나간 일들을 씻어내고 망각으로 덮어버렸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실패의 기억을 쉼 없이 소환시키고 있다. 나이 들면서 얼굴에 나타난 주름처럼 마음속 상처와 아픔의 골은 깊어만 간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건 여전하다. 패배감을 던져내지 못하며 자신을 채찍질하기에 바쁘다. 다산은 이런 태도를 가리켜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이라 일축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힘든 일이다. 물론 어른 노릇 하기는 더욱더 어렵지만.


삶은 세 단계의 타임라인을 타고 흐른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다. 과거는 후회막심한 놀이터였다. 사람들은 과거의 무덤가를 얼쩡거리며 갖은 비난과 저주를 퍼붓는다.


안타까움과 눈물의 휘파람을 불어대면서 말이다. 다산의 말대로 비겁해지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싶던 때가 있었지. 철 모르던 시절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영웅들처럼 되고 싶었다.


세상에 나가 명예와 권력의 칼을 번쩍이며 주목받는 위인으로 살고 싶었던 거지. 언제나 그렇듯 낭만적 허상이 사라지는 시간은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다.


차곡차곡 쌓아 놓은 부푼 꿈들은 바벨탑처럼 무너져 버렸다. 다만  시대가 나를 휘감고 내가 처한 상황만이 비굴함을 강요할 뿐이다. 산다는 건 이런 굴레 속에 갇혀있는 것인지 모른다.


한 젊은이가 다산을 찾아와 길을 물었다. 먹고사는 일에 치여 미래가 불안하다며 공부가 영 손에 안 잡힌다는 것이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런 고민은 현재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세상 사는 일은 어느 시대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산다는 건 동일한 궤도를 지나는 기차에 올라선 것과 같다.


역사의 기차에 올라 캔버스에 자신이 보고 경험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때가 되면 모두가 정거장에서 내려야 한다.


먹고사는 일, 돈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 현실에서 일어나는 좌절감,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어느 것 하나 내 편이 없다.


삶은 마지막까지 이런 밀림 속을 헤쳐 나가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선생은 젊은이에게 뭐라 대답했을까.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하는 일은 매우 낮고 더러운 법이네.

힘들어도 참아야 하고 수틀려도 견뎌야 하지.

그에 비하면 호미 들고 삿갓 쓴 채 비지땀 흘려도 그보다 귀한 것은 없다네".


실로 먹고사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모든 사건들은 이 과정에서 일어난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진짜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고 자신은 혹사당하며 부서져 나간다.


 삶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가족 직장 사업 사사롭고 분주한 일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러저러한 덫들에 걸려 나를 바라볼 시간조차 없는 것이다.


겉으론 화려해 보일지라도 꽃길만 걷는 인생은 해 아래 아무도 없다. 조선 중기 대제학과 영의정을 거칠 만큼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로 정온 선생이 있다.


권력의 전쟁터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그였지만 제주도의 십 년 유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은 정온은 다음 같은 글을 남겼다.


"이제 오십이 되어 나를 돌아보니 한심하고 무참하다.

먹고사는 일에 골몰해서 몸과 마음의 수양은커녕

내가 누군지 조차 잊고 살았다.


내가 나를 업신여기며 함부로 대하고 살았다.

마치 소나 말처럼 천하게 부렸으니

남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건 당연했을 터였다.


젊다면 핑계라도 대겠지만 오십이 면 지천명 아닌가.

이제 행실과 말을 점검하는 일부터 다시 해야겠다".



자신을 함부로 막 대하고 산다는 것. 인생의 아이러니다. 사랑과 용기를 주기엔 너무도 인색하다. 자신한테 너그럽지 못하고 살벌할 이유라도 있을까.


자신을 잘못 다루는 데서 사달이 생긴다. 내가 나한테 잔인한 폭군이었다. 다산과 정온 모두 그 점을 통탄하는 것 같다.


자신과의 진정한 화해는 용서를 전제로 한다. 용서만큼 쉽고도 어려운 일이 어디 있으랴. 용서가 서툴러 일을 그르치고 삶을 어깃장 놓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부부사이, 부모자식사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미움의 강이 가로막혀 있는지 모른다. 미움의 강에 용서의 다리가 놓여야 화해도 가능하다.


생각해 보면 용서에 인색한 것이 삶이다. 가장 나쁜 건 자신에 대한 용서가 없다는 점이다. 사막길 같은 세상을 지나오면서 처절히 싸웠던 나. 사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전쟁이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사선을 넘어 간신히 여기까지 온 나다.  여전히 어깨엔 무거운 짊을 짊어지고 있는 가련한 모습의 내가 여기에 있다.


그런 나를 꾸짖고 몰아세우는 건 너무도 잔인한 처사다. 분노의 채찍과 심판의 칼은 불필요하다. 위로와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너른 들에 봄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새싹에 생기를 돋우는 봄날이 왔다. 그러나 잠깐이다. 어느새 찬바람 불어 가을 시냇가가 차가워지면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인생의 시간이토록 짧다. 지나간 시간의 화살이 깊은 상처를 낸 자리를 아직도 치유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오늘 다산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았다. 이제 자신과 화해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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