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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May 10. 2024

결혼지옥 이혼천국?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불행한 이유가 다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가정이 정원이라면

부부의 행복은 정원에 핀 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밭엔 뱀들이 숨어 있다.


에덴동산의 첫 부부는 뱀에 물려 행복을 죄다 털리고 말았다. 행복의 창가에 불행의 커튼은 한순간에 내려진다.


상류층 가정의 갈등과 불륜 이야기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마중물이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마르지 않는 소재의 샘이니까.


사랑과 배신의 치정극으로 베이스를 깔고 긴장의 수위를 잔뜩 높여간다. 이런 스토리들은 삼시세끼 집밥처럼 그 나물에 그 반찬 같아 식상할 뿐이지만 복수극으로 치닫는 지점에 이르면 채널이 고정된다.


입맛 잃었을 때는 간장 게장이 약이다.  한 입 물어보면 짭조름한 맛에 혀끝이 당겨 집 갔던 밥맛이 돌아오는 감격을 누린다.


불륜 이야기들이 그렇다. 보기 시작하면 남 얘기 같지 않아 보고 또 보는 거다. 공감흡착 능력이 워낙 강해 레깅스 바지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드라마는 심리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분노의 감정선을 건드리기 일쑤다.



드라마 속 이야기는 강한 휘발성 물질에다 마약류의 첨가물까지 믹서 된 제품과 같다. 보자마자 약이 바짝 오르며 열받는 데다 중독성까지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데도 재밌다. 분노와 재미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흥분하기 시작한다. 울면서 동정했다가 욕하면서 분개한다.


불륜 드라마는 시청률을 보장하는 안전장치다. 그러니 계속해서 만드는 거다.


불륜드라마의 원천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있다.


19세기 배경의 이 작품은 전 세계를 통틀어 막장 드라마의 큰 형님으로 군림 중이시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스토리의 내용은 거기서 거기다.


 안나 카레니나는 높은 허리선과 흐르는 듯한 긴 스커트의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었을 것이다. 지금의 배우들은 이보다 훨씬 세련되고 모던하다.


짙은 메이컵에 에로틱한 분위기는 시대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남한의 비둘기가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해서 까마귀가 되는 건 아니다.


18세기 유럽을 뒤흔든 플레이보이는 단연 카사노바였다.


 세계적인 도시 베네치아도 감당 못한 불륜의 아이콘 카사노바는 자신의 재능을 썩히기엔 너무도 아까웠던지 파리 런던 프라하 바르샤바 등지로 쾌락의 무대를 넓혀 월드스타의 입지를 굳혔다.


장소를 바꿔 가며 불륜행각을 벌렸다고 카사노바가 김정은으로 바뀌었을까. 톨스토이가 남긴 한 편의 소설 또한 시대가 달라졌다고 내용까지 변한 건 아니란 말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의 단어, 가정을 부부로 바꾸어도 본문은 크게 다치지 않을 것 같다.


행복한 부부는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부부는 저마다 불행한 이유가 다르다.  


우리 사회는 현재 결혼지옥 이혼천국이라는 두 개의 가파른 계곡을 지나고 있다. 과연 결혼은 지옥이며 이혼은 천국일까.



톨스토이에 따르면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비슷함과 다름에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행복한 부부는 서로 간의 사랑과 이해, 의사소통이나 갈등해결능력에 있어 비슷하며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분위기에 익숙하단다.


이에 반해 불행한 부부들은 불신과 소통부족이 두드려져 역할이나 책임부담에 있어 큰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 말고도 불평의 소재들은 다양하지만.


한쪽은 일치와 공감이 있는데 다른 한쪽은 모조리 딴소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핵심은 서로 간의 공감에 있다.


외출하고 돌아온 남편들은 옷이나 양말을 아무 데나 휙 벗어던진다. 아내의 잔소리가 이때를 놓칠 리 없다.


 대하드라마처럼 끝없는 아내의 잔소리는 대개 연대순을 따른다. 십 년 이십 년 전을 넘어 결혼 전까지 올라가는 히스토리는 장대할 정도다.


극 중 인물도 매우 다양해 시부모 시동생 시누이를 거쳐 사돈의 팔촌까지 등장한다. 별 상관없는 주변인물들을 엑스트라로 출현시켜 자기 말의 신빙성을 얻고자 애쓴다.


 역사대하드라마는 교육적 가치라도 있지만 아내의 잔소리 대하드라마는 남편들의 마음을 더욱 완강하게 만들 뿐이다. 아예 신물이 나는 거다.


이렇게 계란으로 탑을 쌓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들이 가정에서 되풀이되는 게 문제다. 이런 분위기에서 서로 간의 공감을 찾아볼 수 있을까.



남편들 입장도 만만치 않다.

새벽에 나가 늦게 퇴근한 사람에게

아내는 소 닭 보듯 한단다.


마치 돈 버는 기계로 대한다며 무슨 정으로 사는 건지 모르겠단다.


이러저러한 불만들은 화톳불에 집어넣은 밤송이처럼 토닥거리다가 마침내 진화가 불가능한 큰 불로 이어지기 쉽다.


가정 문제의 전문가 오은령 박사의 결혼지옥 프로그램을 보시라. 문제를 겪는 부부가 나와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다른 말들을 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말대로 저마다 다른 이유들이 있는 것이다. 공감의 일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름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 이어질 뿐이다.


행복한 가정은 행복한 부부의 작품이다.


부부가 불행하면 가정의 행복이 유리처럼  깨져나간다. 현재 60대  은퇴자들의 황혼이혼율이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자기 위치를 잃으면서 가정에서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인데. 아내들의 입장도 일리는 있다.


남편과의 소통이 원만하지 않은 데다 집에서 삼식이 노릇하는 남편을 대하기 힘들고 매우 낯설다는 것이다.


은퇴한 남성들은 아프리카 초원을 떠도는 수컷 사자와 다를 바 없다.


처자식 먹여 살릴 힘이 없는 수컷사자는 집에서 쫓겨나 초원을 배회하다가 최후를 맞는다.


어쩌다 떠나온 가정이 그리워 주변을 기웃거리지만 능력 없는 사자는 문전박대당할 뿐이다.


놀부 마누라에게 주걱으로

귀싸대기 얻어맞은 흥부처럼

은퇴자들의 몰골이 갈수록 추레하다. 


동네 공원만 나가 봐도 설 자리 잃은 인생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떠돌이 수컷사자는 우리를 비추는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 사회의 오륙십 대는 이 지점에 와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이혼이 과연 천국일까. 지긋지긋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긍정은 얻을 수 있겠으나 그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할까.


결혼조사 기관에 따르면 재혼자의 팔십 퍼센트 이상이 이혼한단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새들의 세계도 인간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암컷의 울음소리는 위험을 느낄 때 수컷을 찾는 행동이란다.


 새끼들은 부모에게 먹이를 달라는 신호로 울음소리를 낸다. 새들의 울음소리는 새들 가정의 언어인 것이다.


이는 인간부부나 자녀의 모습을 반영한다. 아내는 남편의 보호가 있어야 하고 남편은 아내의 신뢰와 지지하에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닐까.


그 둥지 속에서 자식들이 성장한다. 한 사람이 둥지에서 떠나버리면 그다음은?


가정과 부부의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돈이 아니다.


1958년 일본은 세계최빈국중 하나인 인도나 브라질과 비슷했다.


그 후 500%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행복지수는 오히려 하향곡선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우리도 딱 여기에 걸려 있다. 경제는 폭풍처럼 성장해 풍요를 이루었으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간다. 행복은커녕 헬조선이라 말한다.


자살률은 세계최고 이혼율도 거의 그렇다. 그동안 쾌락의 챗바퀴를 돌고 살다가 영원한 욕구불충족 상태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하면 결혼지옥 이혼천국이라는

해괴한 동네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개와 고양이는 소통능력에 있어 차이가 있다. 손가락으로 어떤 대상을 가리킬 때 개는 사람 손이 아닌  대상 전체를 보지만 고양이는 사람의 손끝만 바라본다.


개에 비해 고양이는 사람과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부부간에도 공감에 있어 이런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손끝만 쳐다보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그가 가리키는 전체를 바라보는 부부도 있다. 초점이 중요하다는 거다.


초점이란 뜻의 포커스 focus 는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본래 벽난로나 화로를 의미한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불 옆으로 모여들었다. 그 자리에서 모든 얘기들이 오갔고 서로의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졌다. 우리에게는 사랑방이 그런 자리였다.


고구마와 밤송이가

화톳불에 튀어 오르는 밤이 되면

발그레한 얼굴빛의 아이들은

전설과 귀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 품 속에서 잠이 들었다. 


부부는 거친 손등을 어루만지며 농사일을 걱정하다가 아이들 장래를 염려했다.


 행복의 기운이 떠나지 않는 포커스, 그 화롯가는 신뢰와 공감으로 서로를 안았던 자리였다.


이 없어도 가슴이 벅찼고 누추한 살림살이었어도 부러울게 없었다.


따스한 기운이 감돌던 포커스, 화톳불이 타오르던 그 자리를  우리는 어쩌다 잃어버렸을까.


우리가 찾아야 할 일은 바로 그 세계가 아닐까. 에스 앤 에스나 유튜브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공감과 소통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현대인은 포커스를 잃은 삶, 따스한 화톳불의 자리를 떠나면서 공감을 잊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가정이 무너지고 가족이 해체되며 부부가 갈가리 찢기는 시대일수록 그 자리를 되찾아야만 한다.


결혼지옥 이혼천국이라는 망칙스러운 말은 사전에서 지워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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