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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May 03. 2024

부부금슬 삐걱거려도 괜찮아

시경 제1편 국풍

요조숙녀 금슬우지

아리따운 처녀를 아내로 맞아

거문고를 켜며 사이좋게 지낸다네.

시경 제1편 국풍


이른 아침 어느 부부가 말다툼을 심하게 했다. 화를 풀지 못한 두 사람이 집을 나와 높다란 언덕길을 걷고 있었다. 부부싸움이 있을 때마다 들렀던 비리프라카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비리프라카 여신은 부부싸움의 수호신이다. 별놈의 신이 다 있지. 여기를 찾는 부부라면 규칙 하나를 꼭 지켜야 했다. 한 번에 한 사람씩만 여신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는 것.


그동안 한쪽은 조용히 경청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고. 듣고 있자니 상대의 말도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열받아 끓어올랐던 분노의 게이지도 쭈욱 내려가면서 말이다.  


이런 광경은 고대 로마시대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없는 신까지 세워 가정의 불화를 해결하고자 했던 로마인들의 지혜와 합리적인 해결책(?)이 앙증맞다.


우리에게이런 아이템 하나 없을까. 부부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중대한 사안이다. 부부싸움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세상에 부부싸움이 너무들 많아 개들도 먹기에 질린다는 뜻이 아닐까.


아리따운 처녀를 아내로 맞아

거문고를 켜며 사이좋게 지낸다네.



시경의 첫 장에 기록된 이 문장은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사서 오경중 하나인 시경은 2천 년이 훌쩍 넘은 고서이자 유가의 경전이기도 하다.


고전작품은 대개 사람의 손을 잘 타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다. 잠시 먼지를 털어내고 읽어 보면 그윽한 품격의 향기가 오월의 라일락처럼 진동한다.


애석하게도 고전 안에는 현대의 가치관에 가려 숨죽이고 있는 문장들이 많이 있다. 언젠가는 주인의 부름을 받을 시간만을 기다리면서.


고전 문장들은 마치 약방의 주인처럼 서 있다가

어느 순간 말렛을 미친 듯이 두들기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오케스트라의 팀파니스트와 같다.


피라미드 안에 잠자고 있던 수 천년 된 미라를 발굴하면 신문의 헤드라인이 떠들썩해진다. 그 안에 꿀도 있다는 가사도 실렸는데 지금 먹어도 될 만큼 상태가 완벽하단다.


 고전은 역사라는 피라미드 안에 묻힌 꿀과 같다. 오랫동안 묵었어도 여전히 맛과 향을 잃지 않은 꿀 말이다. 부부금슬에 관한 구절 역시 꿀맛은 진행형이다.


흔히 화목과 사랑이 두터운 부부를 가리켜 금슬이 좋다 말한다. 금슬 좋은 부부는 당사자도 행복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의 유익균을 퍼뜨린다.


그들은 활짝 핀 꽃의 가루를 실어 나르는 꿀벌과 같다. 꿀벌이 없으면 생태계 전반에 큰 위기를 초래한다.


부부금슬이 메마른 사회는 빵 없는 빵집 같다.


배부르게 살아도 뭔가 텅 빈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뜻이다. 부부금슬이 지나쳐 불행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일은 전혀 없다.


지금까지 어떤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그걸 문제 삼아 논문이라도 썼다는 말을 들어는가. 부부금슬은 무조건 다다익선다.


개인과 사회할 것 없이 행복의 바로미터가 부부 금슬에 있다 말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금슬이란 고대의 악기 중 거문고와 비파를 가리킨다.


금은 다섯 혹은 일곱 줄로 된 거문고인데 여성전용의 악기였다. 슬은 금보다 훨씬 큰 열다섯 줄의 현악기로써 남성들이 연주했다.


고대 음악 연주에서 이 둘은 원앙처럼 꼭 붙어 다녔단다. 두 악기의 앙상블이 전체 연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했던 모양이다.


금과 슬처럼 서로 화합해야만 가정이 화목해진다는 뜻의 금슬상화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부부관계의 화목을 두 개의 악기에 비유했으니 이를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


예나 지금이나 연주의 성패는 하모니에 달려 있다. 백 명이 넘는 오케스트라를 생각해 보자.


오케스트라는 크게  관악기와 현악기의 두 파트로 나뉜다. 그래서 관현악단이다. 서양음악에선 보통 필하모닉 오케스트라(philharmonic orchestra)로 표기한다.


 필하모닉이란 조화를 잘 이룬다는 뜻이니까 관현악단의 생명은 각 파트 간의 조화에 있다는 거다.



여기서 악기 상호 간의 절제와 균형의 미덕이 요구된다.


너무 앞질러도 뒤쳐져도 안된다. 자기 실력만 뽐낸다면 더욱 안된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조화는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점이다.


조율이 안된 현악기 연주는 듣는 이의 신경을 날카롭게 한다. 둔탁한 성질의 관악기 또한 서툴게 다루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비단결 같이 섬세한 사운드를 내는 현악기 연주자가 아내라면 통울림이 크고 거친 관악기 연주자는 남편이다.


 현악기는 관악기의 음색을 조율하며 리드한다. 이럴 때라야 관악기는 특유의 강력한 음향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베이스는 현이지 관이 아님을 잊지말자. 가정 역시 아내를 베이스로 하는 오케스트라와 같다.


남자의 큰 소리는 허공을 향해 불어대는

트럼펫처럼 대부분 허세로 끝난다.

울부짖는 호랑이는

노래하는 꾀꼬리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여성의 섬세함은 성장한 나무를 돋보이게 하는 오월의 연한 풀과 같다. 나무 같은 남성의 투박함을 가려주고 빛나게 하니까 말이다.


관악기의 웅장함과 질박함은 남성을 상징한다. 그는 힘이 있다고 윽박지르는 존재가 아니다. 마치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은 충분하니까. 


나무의 웅대함은 주변의 꽃과 식물들을 편안케 해 준다. 이같이 오케스트라의 조화로운 음향이나 부부간의 화합은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다들 아름다운 창조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최상에 이르려면 오랜 기간의 연마가 필요하듯  부부금슬도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음악이란 소리에 한계를 가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남긴 이 한 마디는 사실상 서양음악 전체를 관통하는 지침서로 작용한다.


소리에 제한을 두는 일은 시경이 제시한 금과 슬의 조화와 다를 바가 없다. 오케스트라 각 파트의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소리에 제한을 두지 않고서는 좋은 연주를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인내와 절제를 생략한 부부가 금슬 좋게 살기는 어려운 일 아닌가.  닭을 잡았다고 털도 안 뽑고 먹을 수는 없다.


오랜 기간 목회 사역을 감당하면서 많은 부부의 결혼을 주례했었다. 그중 재혼과 삼혼도 적지 않았고.


예전과 다르게 요즘 신랑 신부는 매우 영리해서 결혼식 준비를 잘들하고 있는 것 같다. 집 장만 혼수준비 신혼여행지 등등. 아쉽게도 결혼생활 준비는 잘 안돼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결혼이란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생활이다.


금과 슬의 두 악기를 가지고 서로 조율하여 화합의 소리를 내야 하는 일이다. 몇 번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고 악기를 집어던질 일이 절대 아니다.


삐걱거림은 당연한 것 아닌가. 오케스트라의 현과 관의 위대한 연주자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부부도 그렇다고 본다. 잠시의 조화롭지 못한 소리는 고통이 아니라 멋들어진 하모니를 내기 위한 시행착오일 뿐이다.


그 소리도 괜찮고 아름답다. 큰 틀에서 보면 그것은 행복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싼 수업료니까.


구약성경의 시편은 15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남긴 시가 절반을 넘는다. 다윗은 위대한 신앙인임과 동시에 걸출한 시인이자 음악에 정통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지은 시편 가운데 현악에 맞춘 노래와 관악에 맞춘 노래가 있다. 무려 3천 년 전에도 하나님께 예배할 때 현악기와 관악기가 동원되었다는 증거다.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시편을 암송하고 기도할 때 성가대의 지휘자는 현악기와 관악기를 컨트롤하면서 찬양으로 예배의 분위기를 고양시켰을 것이다.


두 악기가 하늘에 까지 전달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금과 슬, 관악기와 현악기로 대변되는 부부간의 사랑은 오월의 찬란함보다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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