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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Apr 26. 2024

성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 제3막

         성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 제3막


1940년 10월 어느 날 스페인의 피레네산맥 줄기엔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몬세라트 수도원을 두른 거대한 바위에 노을이 물들며 진홍색 빛을 반사할 무렵 수도원의 저녁 종소리는 만추의 낙엽을 흔들고 있었다.


정적에 쌓인 이곳에 나치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느닷없이 수도원장에게 물었다. 성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에스 에스 친위대 대장이자 히틀러의 오른팔 하인리히 히믈러였다.


전시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당시 외벽진 수도원을 방문하여 성배를 운운하다니.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었을 게다.


성배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 그리스도가 사용한 나무잔을 가리킨다.


성경에 등장하는 아리마데 요셉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때 흘리던 피를 이 잔에 받아 보관했단다.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배의 행방이 불확실해졌다.  


구약시대 지성소에 안치된 법궤의 행방처럼 성배 역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성배를 향한 집착마저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성배 스토리들이 생겨났다.


전설과 민간설화들이 더해지면서 각 민족의 특성에 맞는 각색이 이루어졌던 것이이다. 통상적으로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신화를 불러들인다.


늘 그렇듯 신화는 이상야릇하고 신비스러운 모티브를 제공해 준다. 낭만주의적 성향에다 공상적 기질이 더해진 사람이라면 이 방면의 마니아가 되기 쉽다.


아돌프 히틀러가 그런 사람이었다. 세상엔 희한한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다. 히틀러는 성배의 전설을 굳게 믿고 있었다.



성배를 찾기만 하면

그 신비스러운 힘을 빌려

나치정권의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중국영화에 등장하는 절대보검 따위와 흡사하다. 하지만 히틀러에게 있어 그것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어야 했다. 물론 대단히 엽기적인 일이긴 하지만.


히믈러의 몬세라트 수도원 방문은 히틀러의 그런 몽상을 현실화시키고자 했던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몸집이 커진 성배 이야기는 중세 유럽의 교회전통에 흡수되어 민간 문학으로 퍼져 나가 파르지팔이란 이름으로 등장했다. 이야기의 중심무대는 스페인의 몬세라트 수도원이다.


이곳은 현재 스페인 관광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았지만 예부터 영적 기운이 감도는 장소로 인식되어 왔다.


 언제부턴가 이 수도원에서 성배 기사단이 조직되어 그것을 굳건히 수호하는 임무를 맡아왔던 것이다.


어느 날 수도원이 자리한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동식물들이 말라죽어갔고 사람들의 생존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 생태계 전체에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성배수호단장까지 병을 얻어 누워버렸다. 수도원이 혼란에 빠져든 건 당연한 일이었 터. 고난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의 성배수호임무도 망각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수도원은 있으나 마나 한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성배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주인공 파르지팔이 수도원을 찾은 시기는 바로 이때였다. 병상에 누운 성배기사단장을 향해 물었다.


성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파르지팔의 외마디 일침이 떨어지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죽어가던 동식물들이 살아나고 자연환경은 생기를 얻어 소생하기 시작했다. 병들었던 사람들이 치유되고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이제 수도원은 본연의 임무를 감당하게 된 것이다. 파르지팔은 바보, 어리석은 자란 뜻이다. 어리석지만 순수한 자가 던진 질문 하나가 그들을 일깨워 모든 것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당신은 왜 가장 중요한 일을 팽개치셨습니까. 왜 그걸 잊고 사십니까. 파르지팔의 메시지는 이런 뜻이 아니었겠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런 종류의 신비전설을 각색하여 불후의 명작을 만드는 대가였다.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내면에 파고드는 합창은 마법에 홀린 듯 신비적인 도취감에 빠져들게 한다.


여기에 컬트적인 요소의 무대연출이 더해져 바그너의 오페라는 19세기판 블록버스터 영화라 할 만하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는 파르지팔이다.


당연하지만 성배의 전설이 오페라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3막에 등장하는 주인공 파르지팔의 노래 '성배는 어디 있습니까'는 작품의 절정을 이룬다.


이 대목에 이르러 히믈러의 질문이 겹쳐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우연일까. 결코 아니라고 본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광팬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바그너 오페라의 방대한 텍스트를 거의 암송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파르지의 대본도 예외는 아니다.


 몬세라트 수도원에서 히믈러가 던진 질문은 히틀러의 말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면 히틀러는 자신의 분신 히믈러를 앞세워 인류에게 메시지를 전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파르지팔의 의도와는 다르게 조롱과 독설을 퍼붓고 있는 게 아닐까. 어쨌든 전설 속에 잠자던 파르지팔의 질문을 본래의 그 장소에서 끄집어내어 재생시킨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였다.


다만 순수한 자의 입이 아닌 악한 자의 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영화보다 더 극적이며 잔인할 만큼 사실적이다.


 산다는 일. 참으로 그것은 알다가도 모를 미궁이요 미스테리다.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상연된 이 작품을 관람한 직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파르지팔 공연에서 바그너는

최고의 예술적 완성도에 이르렀으며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여론조사 때마다 단골 질문 하나가 있다.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느냐'이다. 대답 또한 그대로다.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이다. 다른 나라들도 돈이 중요하다고 답하지만 가족이나 건강 자신의 가치추구보다 앞서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우 돈보다 앞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돈은 가장 중요한 절대상수다. 돈이 중요하단 걸 누가 부정할까. 하지만 돈만이 사람과 인생을 평가하는 유일한 가치척도가 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런 사상이야말로 삶의 위기와 절망을 몰고 온다.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선해도 돈이 없으면 사람대접 못 받는다. 가장 중요한 것을 내팽개친 상실의 시대가 지금이 아닐까.


 물질적 욕망에 매몰되어 목적과 이유를 묻지도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맹자가 살았던 춘추 전국시대도 그랬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곧 찾을 줄 알지만

잃어버린 마음은 찾을 줄 모른다.

공부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다.

맹자의 '고자장구 편 상'


맹자보다 이 삼백 년 후에 살았을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도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아무도 차지하지 못하게 한다.

부동산 문제로 사소한 분쟁만 생겨도

달려가 돌이나 무기를 집어든다.


하지만 남들이 자기 인생 안으로

끼어드는 것은 내버려 두고 만다.

심지어 자기 인생을 점령할 사람들을

자청하여 불러들인다.


이걸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자기 돈을 나눠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나눠 주는가.


사람들이 재산을 지킬 때는 인색하면서도

시간을 낭비하는 일엔 너그럽다.

세네카의 '인생이 왜 짧은가'.


몬세라트 수도원 사람들에게 성배는 살아야 할 진정한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이것을 되찾았을 때 가뭄과 빈곤 이 사라지고 주변환경이 회복되었다.


삶의 중심이 흔들리면 만사가 뒤틀려 카오스로 빠져버리고 만다.


우리에게 성배는 무엇일까. 분주한 일상에 가려 자신의 진정한 꿈과 소망을 잃고 목적 없이 살았던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성배를 되찾아야 사물의 질서가 바로 잡힌다.

당신의 성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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