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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Apr 12. 2024

인생은 해석이다.

이솝의 토끼와 거북이

        거북은 잠자던 토끼를 앞지르고 이겨 상을 받았다.


인생은 해석이다.

아이소포스(이하 이솝) 우화의 해학적 이야기들은 이를 증거한다. 그의 토끼와 거북이 편은 천병희 선생 번역 한글판으로 일곱 줄에 그친다. 그리스어 원문은 이보다 더 적을 것이다. 


어느 날 두 동물이 경주를 벌였다.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느림보 거북이가 잠자던 토끼를 이기고 상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한 줄 문장이 이천 오백 년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결이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때문이다.


거북이의 꾸준함이 토끼의 재능을 이길 수 있다. 이것 말고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녕 인생은 해석이며 해석한 대로 살아간다.


이솝은 기원전 오백 년 경 그리스에서 활동한 작가로만 알려졌다. 그가 남긴 불멸의 우화들 가운데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대중성에 있어 여타의 작품들을 능가한다.


지구에 머물다 간 여행객들 중 누가 이 이야기를 모를까 보냐. 스토리가 미친 광대성으로 볼 때 구약성경의 다윗과 골리앗 얘기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리스의 고전 작가들은 많이 있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비극작가들이나 아리스토파네스, 메난드로스 등의 희극작가들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들을 읽은 후에 감동의 울림을 측정해 볼 때 이솝의 스토리에 못 미치는 것 같다. 순전히 내 해석이지만.


그들이 위대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감정의 이입이나 교훈, 영향력면에서 이솝만큼 크지 않다는 뜻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도 심오한 통찰력을 얻을 수는 있어도 토끼와 거북이만큼 임팩트가 강렬하진 못하다. 이게 다 내 책임인가.



이솝의 토끼와 거북이는

시대와 역사를 거치면서 다양한 버전으로 거듭났다. 


덴마크의 안데르센은 색다르게 각색하여 내놓았고 우리에게도 별주부전 이야기가 있다.


오늘날 아동용 교육 프로그램이나 각종 광고라든가 과자 사탕 어린이 장난감 등의 이미지 툴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이솝이 이천오백 년 전에 창작한 작품 하나로 후세 인류는 짖어 먹고 볶아 먹고 삶아 먹고 우려먹기까지 한다.


진액이 다 빠져 더 이상 나올 국물이 없어 보이는데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뭐 어떤가 저작권에 걸릴 염려도 없는데.


이솝은 토끼와 거북이라는 본연의 이미지를 완전히 비틀어 놓았다. 기존의 고정관념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롯이 작가적 상상력이 동원된 해학이지만 창작의 도끼로 갈라놓고 문장의 톱으로 잘라낸 솜씨가일품이다.이솝에게서 교훈을 얻기 원하는 독자라면 준비물 하나쯤은 꼭 준비하자.


자신만의 상상력이다.

그것은 일종의 그라인더다.


이것으로 본문을 갈아내어 새로운 형태를 세워야 한다. 그런 다음 각각 문맥의 아구를 맞춘 후 자기만의 색깔로 페인팅해서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해석의 가공을 거친 토끼와 거북이는 이렇게 해서 새 모습으로 등장한다. 해석에 도가 튼 사람이라야 창의적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작품은 해석자가 머무는 시대마다 문화와 세계관의 옷을 입고 새 버전으로 재탄생한다. 따라서 해석은 새로운 창조가 된다. 고전이 주는 매력은 이런데 있지 않을까 싶다.


예술 작품의 위대성이

오리지널 콘텐츠에서 비롯되는 건 맞다. 


해석의 가능성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바흐와 비틀스의 음악을 생각해 보자. 저들의 위대한 공로는 편곡이라는 해석의 문을 활짝 열어준 것이 아닐까.


어떤 장르든 무슨 악기로 연주하든 잘 어울린다. 여기에 큰 감동은 보너스로 더해진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편견 없이 토끼와 거북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토끼는 지금도 온종일 풀만 뜯어먹고 있다.


풀이 너무 맛있단다. 풀 먹는 토끼의 얼굴엔 하늘의 평화가 충만하다. 그저 무심의 경지에서 풀을 뜯고 있을 뿐이다.


거북이도 바닷속을 유유히 거닐면서 멋진 삶을 향유하고 있다. 간혹 포식자들의 집적 거림이 신경에 거슬리지만 화강암처럼 단단한 방패가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어 염려할 것 없단다.


들 머릿속에는 용궁이나 거기 최고 권력자의 건강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다. 녀석들은 풀만 뜯어먹으면 행복하고 바닷속을 돌아다니면 만사형통이다. 행복의 조건이 너무나 심플하다.

  


모든 걸 복잡하게 만드는 주체는 인간이다.


이솝이 엮어낸 이야기에 해석이 덧칠해지는 순간 생뚱맞은 모습들이 나타난다. 해석은 인간들끼리의 허접한 시시비비를 양산하곤 한다.


다음과 같은 썰들이 대표적이다. 게으름의 대왕 거북이가 민첩한 토끼를 이긴 건 순전히 토끼의 아량 덕분이다. 이건 토끼 동정파들의 주장이다. 반대도 만만치 않다.


토끼는 갑이고 거북이는 을과 같아서 현대판 용과 미꾸라지 모델로 치환할 수 있단다.


거북이처럼 변변한 스펙이 없어도 꾸준히 노력만 한다면 금수저를 입에 달고 태어난 갑 토끼를 이길 수 있다는 거다.


희망고문에 가까운 이런 논리는 주로 자기 개발서 류에 등장하는 단골메뉴다. 물론 이것이 이솝이 전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이긴 하지만.    


성마른 사회정의론자들도 끼어든다. 


경주 시작부터 토끼는 한 마리였지만 거북이는 열두 마리로 출전하여 선수 규정에 있어 게임의 룰이 잘못되었다는 것.


게다가 토끼가 잠들고 있는 동안 거북이는 바통 터치를 잘할 수 있는 덕에 이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 결과 처음부터 토끼 필패 거북이 필승은 정해졌다는 것이다. 이들 눈엔 모든게 불평으로 가득차 있다.


음모론자들은 여기서도 활개 친다. 토끼가 잠들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강력한 수면제를 먹였던 게 틀림없어.


토끼가 장시간 해롱해롱 댔던 건 다 그래서야. 잘 생각해 봐.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단 말야.


사람들의 호기심을 의심의 불쏘시개로 쑤석거려 사건의 진상을 흐려놓는 일은 음모론자들의 몫이다.


토끼와 거북이 단 한 편의 이야기도 이렇게 해석이 구구하다. 하물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랴. 그건 그렇고.


토끼의 귀가 저토록 길어진 이유가 무얼까.

대관절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토끼 얘기를 각색하고 비틀어서 밤낮으로 입방아 찌는 인간들 때문이라 추측해 본다.


쉴 새 없이 속살거리는 사람들에게 시달린 나머지 비정상적 진화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비정상적 생각(?)을 해본 것이다.


실제로 토끼의 귀에는 온갖 신경계의 세포들이 몰려있을뿐더러 예민한 열 감지 기관까지 장착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젠 심드렁한 토끼 얘기는 그만두고 그냥 해방시켜 주자.



그렇다면 거북이는 어떤가.


거북이의 목은 보기에 몹시 거북스럽다. 거북이의 용모가 거북스럽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거북이를 거북스럽게 대해서 아닐까.


거북이 책임이 아닐 거다. 우리는 자세불량으로 생긴 목의 기형적 변형을 거북목이라 부른다.


거북이가 듣기에 몹시 불쾌한 말이다. 왜 나쁜 이미지들을 우리 거북이한테 덕지덕지 붙이냐 이 말이다. 이 때문에 거북이들의 인간기피현상, 사회 공포증이 생긴 거란다.


어느 날 건강체로 살고 있던 거북이들이 인간들의 등쌀에 못 이겨 그만 속세를 떠나 버렸다는데. 본래는 육상동물이었던 거북이가 지상을 탈출해 바다로 잠수해 버리고 말았다는 전설이 그것인데.


모조리 그런 이유 때문 아닐까. 이런 해석으로 몰고 간다면 신화숭배자라도 될 것 같다.


이솝이 남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그 빛을 잃지 않으리라.


상징, 이미지, 상상, 교훈, 해학에 이르기까지 이 짧은 우화는 영원히 마르지 않은 창작의 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에든 그림자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해석이 한 번 고착화되면 그것을 벗겨내기가 어렵다는 그 사실 말이다. 일단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으면 거기에 갇혀버리기 쉽다.


팩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각자 개인의 몫이지만 그 결과는 큰 차이를 가져온다. 인생은 곧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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