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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 프로방스 May 17. 2024

오월의 찬가 그대 거기 머물러 있으라

슈만의 시인의 사랑 /괴테의 파우스트

황홀하게 아름다운 오월

모든 꽃봉오리들이 터졌을 때에

나의 마음에는 사랑이 싹텄습니다.

*로베르트 슈만의 시인의 사랑*


머물러라 그대는 아름답도다.

*괴테의 파우스트*



봄은 오는가 싶더니 가버린다. 간밤에 비가 내리자 새 꽃들이 피어났다. 천신만고 끝에 피어난 꽃이지만 사월의 심술바람을 견디지 못해 땅을 구른다.


봄은 허망과 슬픔으로 얼룩진 인생을 보여준다. 빨래터 수양버들 늘어진 곳에도 봄은 로맨스를 선물한다.


빨래터 시냇가 위 수양버들 곁에서

백마 탄 도련님과 손 잡고 정 나눴네

차마 끝 삼월 봄비 연하여 내린대도

손끝에 남은 향기 차마 어이 씻으랴.

   *이제현(1287~1367)의 제위보*


사월의 시샘바람은 꽃잎을 떨어냈지만 오월의 순한 바람은 새싹을 만지며 지나간다. 가지에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대지는 연초록으로 갈아입는 계절이 왔다.  


어느새 내 집 주위를 포위한 오월, 요놈은 잡아놓고 머물게 해야겠다. 시간의 구름이 산허리를 돌아 무심하게 넘기 전에. 오월을 놓친다면 죄다 내 탓이다.


시인 김영랑은 오월을 테마로 하여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늘 섭섭해 울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오월은 축복이다. 오월을 지나는 인생은 벅찬 환희요 감격이다. 이 계절에 염려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마음의 쓴 뿌리들이 고개를 내밀도록 그냥 두어선 안된다. 


겨울의 삭막함을 잊은 땅은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천국이 땅에 의해 침식당하는 유일한 시간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순간의 유토피아가 실현되는 것이다.


작곡가 슈만은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여 시인의 사랑을 내놓았다. 불멸의 이 노래는 오월에 부르는 사랑의 찬가다. '꽃봉오리가 터질 때 마음엔 사랑이 싹튼다'.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할 때면 인간의 영혼은 날개를 타고 비상한다. 이런 순간을 놓칠 수 없다며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절규한다.



오월이여 거기 머물러 있으라

그대는 참으로 아름답도다. 


아름다움은 강아지가 문틈을 지나가듯 한 순간에 사라진다. 봄은 아름다움을 싣고 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무지개다.


 봄은 꽃과 풀을 씨실과 날실 삼아 엮어내는 마법사다. 마음에 찾아와 그리움의 씨를 뿌려놓고 사라지는 연인 또한 봄이다.


그리움은 기다림이다. 언제 만날 기약도 소망도 없다지만 기다림 자체가 소망이요 아름다움이다.


그리움은 불현듯 동경의 배낭을 짊어지고 기꺼이 여행길에 나선다. 봄날의 떨림은 그리움과 동행하는 벗이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서도록 등을 떠미는 친구 말이다.


그리움에 이끌려 낯선 곳을 찾아가는 봄날의 순례자들은 얼마나 많은지. 여행은 연애와도 친근하다.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 곧 나의 연인이다. 여행을 마친 후에도 추억은 과거를 현재로 소환시켜 미소 짓게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마들렌 과자의 맛과 향기를 맡으며 과거로의 머나먼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지에서의 경험은 그리움을 일으키는 마들렌 과자와 같다.


고풍스러운 건축물, 좁은 골목길, 거리의 낯선 사람들, 커피 한 잔의 맛과 향기, 연인들을 기다려 주는 오래된 다리,


 해안가를 바라보는 핑크빛 가로등, 이질적인 조형물들, 곳곳에 배어있는 특유의 냄새, 골짜기에 숨어 있는 수줍은 꽃들, 햇볕에 졸고 있는 고양이.


오월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이탈리아의 토스카나를

비켜 가긴 어렵다. 


토스카나의 오월은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의 팡파르로 문을 연다. 팡파르 세례를 받은 토스카나의 너른 들은 생명의 기운이 충만해진다.


피렌체를 벗어나 외곽의 구릉지대를 달리면 하늘과 맞닿은 초록의 들녘이 끝없이 펼쳐진다.



깨질 듯 파란 하늘 아래 양귀비꽃들이

검붉은 피를 쏟아내듯

격한 아름다움을 토해낸다.


언젠가 사정이 허락된다면 토스카나의 한 농가를 찾아 머물고 싶다. 춘곤증을 못 이겨 졸고 있는 농부와 고양이가 있는 집이라면 더 좋겠다.


무심한 듯 창가에 기대어 온종일 오월의 들녘을 바라본다. 마음이 비워질 때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노래하는 거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오월

모든 꽃봉오리들이 터졌을 때에

나의 마음에는 사랑이 싹텄습니다.


프로방스는 사철 온화하여 일 년 내내 푸르고 꽃이 핀다. 언제나 봄이 머무는 곳이다.


프로방스의 중심도시 액상 프로방스의 미라보 거리에 들어서면 넓고 평탄한 길 양 옆에 수백 년 수령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반긴다.


이들의 녹음은 이글거리는 태양빛을 막아주고 오가는 여행객들을 쉬게 해 준다.



프로방스가 남긴 추억은 무엇보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있다.


피레네 산맥을 타고 넘어오는 온화한 지중해성 바람, 저 멀리 아프리카 사하라에서 대장정을 시작해 지중해를 통과한 후 레몬향을 실어다 주는 시로코 바람,


한니발이 넘었던 북쪽 알프스 산정의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찬기운이 꺾여버린 건조한 바람.


이들 모두가 프로방스에서 만나 한바탕 잔치를 벌인다. 프로방스를 떠난다 해도 코끝에 머문 바람의 숨결을 떨어낼 수 없을 것이다.


오월이 저물던 어느 날 프랑스 남부 코트 다 쥐르의 니스에 머물렀다. 니스에서 이탈리아의 토리노를 거쳐 밀라노 방향으로 향할 당초의 계획을 취소하고 말았다.


프로방스의 내륙도시 그라스로 가기 위해서였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읽은 독자라면 내 결정에 동의했을 것이다.


이 책은 꽃과 향기의 세계에 혁명을 일으킨다는 도발적 주제를 담고 있다. 그 중심무대가 그라스이다.


프로방스 까지 와서 지척에 둔 그라스를 방문하지 않고 지나치기에는 향수에서 받은 감동이 너무 강렬했다.



오월이 되자 도시는

온통 장미의 물결로 뒤덮여

한 달 내내 도시전체에 크림처럼

달콤한 보이지 않는 안개가 자욱했다

7월 말에는 재스민이 한창이었고 팔월에는

밤히야신스의 계절이었다. 꽃 중에서 가장

귀중한 꽃이라서 그런지 이 꽃들은

자신들의 영혼인 향기를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그라스에 들렀다 해도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밝힌 꽃들의 정체를 살펴보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하지만 도시 전체가 꽃들로 뒤덮여 향기의 운무를 드리우고 있는 세상이었다.


화장품이나 향수의 세계적 생산지들이 프로방스 전역에 몰려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꽃들이 희생된다는 사실을 현지에서 알게 되었다. 자그마한 향수 한 병 속에도 꽃들의 고고한 넋이 담겨 있었다.


꽃들이 없다면 아름다움의 조력자 화장품 따위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라스를 떠나기 전

프라고나르 박물관에 들렀다.


화장품 몇 점을 집어 들자 여직원 한 명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준다. 고마워서 립서비스 한 마디 해주었다. '당신은 여기 화장품들보다 더 아름답군요'.


이 말에 어쩔 줄 모르며 좋아한다. 얼굴에 연한 장밋빛 홍조가 비친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


국적에 상관없다. 여성들의 한결같은 꿈은 아름다움 아닌가. 그것도 이십 대의 김태희 얼굴을 소망하면서 까지.


프로방스에 다녀온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어도 프라고나르 여직원의 벅찬 미소는 오월과 함께 남아 있다.

  

향기는 꽃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라운지에서 마신 카푸치노 한 잔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동일한 장소를 다시 찾아 똑같은 커피를 마신다 해도 그날의 정취는 아닐 것이다. 향기는 휘발성 물질처럼 금방 사라지니까.  


그러나 옷에 묻은 향기는 쉽게 사라져도 마음에 배인 향기는 가시지 않는다.


여행의 추억이 더해지면서 오월의 아름다움은 행복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


오월이 다 가기 전 독일의 명테너 프리츠 분덜리히가 부른 시인의 사랑을 듣고 싶다. 분덜리히 말고 누가 더 아름답게 부를 수 있을까. 그런 후에 이렇게 외치고 싶다.


오월이여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

그대는 참으로 아름답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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