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문 열 번째 날

통영. 거제 여행 1

by 도린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형부, 큰언니, 둘째 조카와 나, 우리는 어김없이 일박이일 여행을 떠난다.
한국에 올 때면 늘 가까운 식당에서 한우를 먹거나, 영덕이나 강구쯤 가서 동해 바다의 싱싱한 회를 맛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조금 더 멀리, 하루쯤 묵으며 떠나보기로 용기를 냈다.
경주, 후포, 여수에 이어, 이번에는 남해의 바다 내음이 가득한 통영으로 향한다.
운무가 내려앉은 산자락과 곡식이 알차게 익어가는 논밭 위로 피어오르는 아침안개가 만나, 초가을의 정취가 차창 너머 풍경 속에 겹겹이 물든다.


진주휴게소에 들러 뜨끈한 소고기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십 원빵을 4천 원 주고 사 먹으니 배가 든든하다. 출발할 때 흐리던 하늘도 마침내 청명하게 개어, 여행의 기분까지 활짝 만개되었다.

“건질 게 없나?” 하고 고터 마켓의 명품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카와 나는 여기저기 매대를 휙휙 지나며 신나게 수군거리고,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뽕짝의 신명나고 간드러지는 리듬에 뒤섞여 시끌벅적하다. 진열대 위 반짝이는 가방과 구두를 눈으로 훑으며, 우리는 잠시 현실을 잊고 여행의 기분에 푹 빠진 채 다시 차에 오른다.

진주휴게소에서 소고기국밥과 십원빵
진주휴게소: 고터의 명품들


우리의 여행엔 뚜렷한 목적이 없다. 팔순을 바라보는 형부, 칠십이 넘은 언니, 그리고 나. 그저 떠난다는 것, 함께 길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형부와 언니는 싱싱한 회 한 점, 뜨끈한 찌개 한 그릇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사는 게 바쁘기도 하고, 강직성 척추염을 오래 앓아 평소엔 집 안에서만 지내는 형부는 ‘죽돌이’ 수준의 노잼형이다. 그 옆에 있는 언니는 그런 형부 곁에서 평생을 더 깝깝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총대를 멘다. 분위기를 띄우고, 까불까불 웃음소리를 퍼뜨리는 게 내 역할이다. 사부작사부작 늘어놓는 아재개그와, 뽀롱뽀롱 읊어대는 7080 감성 충만한 노래로 나는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한다. 조카와 형부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하고, 큰언니는 나와 박자를 맞춰 함께 흥얼거린다. 이 사소한 즐거움과 소란이, 우리에게 일 년에 한 번뿐인 여행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렇게 함께한 세월이 쌓이다 보니, 묵언수행하듯 말이 없던 형부의 입에서도 이젠 방언이 터지듯 이야기가 줄줄이 쏟아진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18번을 듀엣으로 열창하며, 추억을 소환하고 가슴속 응어리를 풀듯 여행은 절정에 이른다.


조카는 우리의 든든한 드라이버이자 일정 플래너다. 맛집을 찾아 안내하고, 경치 좋은 코스를 짜며, 건어물을 살 수 있는 시장까지 척척 안내한다.


통영수산시장에 들러 펄떡거리는 활어를 구경하고, 싱싱하고 달큼한 농어회 한 접시와 얼큰한 매운탕으로 통영의 맛을 즐겼다. 커피와 얼그레이 차로 개운하게 마무리한 뒤, 거북선이 있는 강구안 도로를 천천히 거닐었다.

통영수산시장에서 먹은 회, 매운탕


마침 제44회 통영문화축제 기간이라, 거리 곳곳에 그림과 디카시 전시가 펼쳐져 있었다. 그중 통영의 정취를 가장 잘 담아낸 듯한 한 편의 디카시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사진과 시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통영의 빛과 바람, 그리고 사람들의 온기를 가늠해 본다.


가을 축제로 들뜬 강구안의 밤거리는 한층 더 활기차고 시원해졌다. 우리의 여행 첫날이자 마지막 밤도 그렇게 깊어갔다. 해묵은 이야기를 나누고 회포를 풀며, 바다 내음과 가을바람, 축제의 불빛이 어우러진 세월의 골목을 함께했다.


통영축제에 전시된 디카시


통영 강구안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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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말— 우리식 여행

통영의 동피랑 마을도, 케이블카도 이번엔 패스했다. 이미 가봤고, 굳이 다시 찾지 않아도 충분했다.
이제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우리의 속도와 취향에 맞춘 느긋한 여정이 더 잘 어울리는 야속한 연세에 익숙해져 간다.
정해진 코스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고, 눈길이 머무는 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여행.
사진보다 기억이 오래 남고, 명소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그런 여행.
그게 바로 우리 넷이 만들어가는 ‘우리식 여행’이다.



팥빙수와 커피와 얼그레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