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문

by 도린

시아버지를 찾아

“ 마흔쯤 되는 키가 훤칠하고 늘씬한 여자 옷 한 벌, 백화점에서 사면 얼마쯤 하노?”
“아버님, 저 옷 사주실라고요?”
“허허, 니는 눈치도 빠르네.”

시아버지가 살아생전 밴쿠버에 오셨을 때 일이다.
백화점에 가서 시아버님이 사주신 정장 한 벌을 뽑아 입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시부모님과 우리 내외, 큰딸과 둘째, 그리고 무지개다리를 건넌, 입양해 키우던 강아지 토리까지 포즈를 취했다.


결혼 후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왔다.

귀에 환청이 들릴 만큼 힘겨운 시간들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시집살이를 해 본 적은 없으니

하나님은 참 공평하시다는 자조 섞인 농반 진반의 고백을 스스로에게 해 본 적도 있었다.


목사로 43년을 성역의 길로 걸어오신 시아버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 둘을 남겨 둔 채, 남편과 함께 서둘러 한국으로 향했다.


의식이 없으셨고 손가락 한 마디만큼 말려 올라간 혀에 기면 상태의 아버님을 보는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막대기에 스펀지를 감아 물을 적셔,

갈라지고 메마른 입술을 조심스레 닦아 드렸다.


무의식 중에도 청력은 반응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아버님 귓전에 나즉이 말했다.

“아부지, 저 왔어요. 밴쿠버에서 애비도 왔어요.”


신기하게도 아버님은 미세하게 손을 움찔하시며 응답해 주셨다.

살아생전 즐겨 부르시던 찬송을 틀어 드리고 손을 꼭 잡은 채,

나는 자주자주 아버님 귀에 안부를 전했다.


소천하시기 이틀 전,

아주버님 내외와 시누이 식구들,

밴쿠버에 있는 우리 딸들을 제외한 모든 조카들이 모여

아버님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기렸다.


아버님은 기면 상태에서도 손을 들어 우리에게 축도를 해 주셨고,

두어 시간 동안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셨다.


2017년 10월 24일 아침,

나는 여느 때처럼 가장 먼저 병원으로 향했다.

아버님 손을 잡고 나즉이 문안 인사를 드렸다.

“아부지, 애미 왔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바이탈을 체크하던 기계의 수치에서

산소 농도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시어머니와 남편, 시누이들이 도착했고

우리는 마지막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때 밴쿠버에 있던 첫째와 둘째가 영상 통화로 함께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마음에 평강이 찾아옴은…”


찬송이 흐르는 가운데

아버님의 안색은 점점 푸르스름하게 변해 갔다.

얇은 숨 한 번을 내쉬신 뒤,

아버님은 천국을 향해

담대히, 그리고 평안히 입성하셨다.


그렇게 소천하신 지,

벌써 8년의 시간이 흘렀다.


흐리고 간헐적으로 비가 내리던 하늘이 걷히고,
모처럼 화창한 날씨였다.

남편과 큰 시누이 내외와 함께
시아버지 산소에 들렀다.

성묘에 앞서 남편 집례로
시댁 식구들이 모여 추도예배를 드렸다.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의 성화에
우리는 서둘러 산소로 향했다.


34년간 목회하셨던 교회 묘지 한켠,
그곳에 아버님이 안장되어 계셨다.

결혼 후 첫째를 낳고 힘들어하던 우리 부부에게
시아버지가 해 주신 말씀이
내 삶의 지침이 되어

지금까지 나의 인생을 이끌고 있다.


“아부지, 니들 부부 힘든 거 다 안다.

그래도 매사에 감사해라.

더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안에서 감사해라.”


산소에 돋아난 잡풀을 뜯고

마른 낙엽을 쓸며

우리 부부에게 그 말씀을 건네시던

아버님의 마음을 가늠해 보았다.


“내년엔 아이들과 함께 올게요, 아버님.”


내일이면 밴쿠버로 돌아간다.

멀고도 가까운 두 세상 사이에서

항상 나를 붙들어 준 건

믿음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었다.


떠나온 곳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그곳에 남은 이들의 사랑이

오늘의 나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비행기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리라.

아버님의 미소가 구름 사이로 번져오듯,

감사의 마음이 또 다른 여정의 빛이 되어

나를 인도해 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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