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과 Ground Hog Day

초록을 기다리는 마음

by 도린


1. 봄, 초록의 서사
봄이 오는 길목에서 문득 생각합니다.
이 계절을 마다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고요.
봄은 그 자체로 온통 초록의 서사입니다.
가만가만 움트는 새싹에서
도란도란 손을 벌리는 어린 잎새들,
시나브로 수런거리며 짙어지는 숲의 이야기까지.
깊어지는 초록의 그라데이션을 따라
무르익어 갈 봄을 그리며
따순 계절을 향해 조용히 손짓해 봅니다.


2. 아스라이 떠오르는 유년의 입춘
어릴 적 학교의 책상도, 칠판도 모두 초록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붓글씨를 즐겨 쓰시던 아버지는 입춘이면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 쓴 글귀를
대문 좌우에 붙여 주셨지요.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국민학교 교정은
참새 떼처럼 재잘거리던 동심으로 가득했고,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마음은 이미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었지만,
그때 우리는 봄이 오고 있다는 걸
몸보다 마음으로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3. 밴쿠버에서 만난 그라운드호그 데이 (Groundhog Day),그리고 성촉절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캐나다의 겨울 끝자락에서
입춘과 경칩을 떠올리게 하는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라는 절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2월 2일, 겨울잠에서 깨어난 마멋이 굴에서 나와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지에 따라 겨울이 더 이어질지, 봄이 곧 올지를 가늠하는 날입니다.
햇빛이 강해 그림자가 또렷하면 겨울이 여섯 주 더 남았다고 하고, 흐린 하늘 아래 그림자가 보이지 않으면 봄이 가까이 왔다고 믿지요.
과학이라기보다는 믿음에 가까운 이 전통의 뿌리를 더듬다 보니,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본래 유럽의 성촉절(Candlemas)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에 닿게 됩니다.
성촉절 역시 2월 2일, 아기 예수가 성전에 봉헌된 날을 기념하며 촛불을 켜 그리스도를 빛으로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날 둥근 크레페를 부치며 태양과 다가올 봄을 상징적으로 맞이했다고 하지요.
독일 이주민들이 이 풍습을 북미로 옮겨 오면서
고슴도치는 마멋으로 바뀌었고, 촛불 대신 동물이 계절을 예고하는 그라운드호그 데이라는 이름의 절기로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을 먼저 불러보고 싶어 하는 마음, 긴 겨울 끝에 봄이 와 주기를 조심스레 점쳐보는 사람들의 기다림 말입니다.
그날만큼은 사람들의 대화 속에 유난히 ‘봄’이라는 말이 자주 섞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을 기대하면서,


4. 회색 하늘 아래 피어나는 예감
밴쿠버의 겨울은 눈보다는 비가 부슬부슬 이어지는 우기에 가깝습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축축하게 젖은 거리, 회색으로 낮게 내려앉은 하늘. 입춘이 지났음에도 겨울의 끝은 여전히 더디고,봄은 마치 숨을 고르듯 조용히 머뭇거립니다.
그럴수록 떠올리는 건 대문에 붙어 있던 한 장의 글귀가 품고 있던 따뜻한 의미와, 곧 마주할 또 다른 계절을 바라볼 마멋의 순간입니다.
절기가 날짜를 앞서갈 때, 마음은 이미 계절의 방향을 한 발 먼저 틀어 두었던 시간들. 까치 울음과 제비의 귀환 같은 아주 사소한 신호에도 우리는 기꺼이 희망을 얹어 살았습니다. 절기는 결국 달력보다
사람의 마음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걸 그 시절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5. 두 세계가 맞물리는 봄의 문턱
올해 입춘은 2월 3일,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2월 2일입니다. 한국과 밴쿠버의 시차를 따져보면 두 절기는 묘하게도 거의 같은 시간에 맞물립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같은 계절의 문을 두드리는 셈이지요.밴쿠버의 회색 하늘 아래에서도 마멋이 굴에서 잠시 몸을 들어 올렸다는 소식은 별것 아닌 이야기 같지만 마음 한편을 은근히 밝힙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빗소리 사이로 오래 기다려온 봄의 예감이 서서히 스며들듯이.
겨울이 끝나가니 이제 준비하라는, 얼었던 땅이 곧 풀릴 거라는 자연의 조용한 속삭임처럼 말입니다.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은 나라가 달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확신보다는 기대로,
현실보다는 예감으로
봄을 먼저 살아보는 일.


그라운드 호그 데이와 입춘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초록색 웃음을 길어 올립니다.


마멋 (Ground Hog)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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