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수채화

엄마의 마지막 시간

by 도린

아침, 전 부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생선전, 호박전, 고추전, 배추 전을 부치고, 언니는 소고깃국을 끓이고 방앗간 손님을 맞으러 갔다.


엄마의 살 날이 길어야 열흘 정도라는 소식을 듣고 밴쿠버에서 한국에 온 지 열하루째.

의식 없이 정물화처럼 링거액 하나로 침대에 고정된 지 두 달째.


욕창과 설사로 인한 지독한 냄새도, 매초 매분 몇 그램씩 엄마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벌떡 일어나 기운 차리지 않는 이상 목숨줄이 무슨 소용 있겠나 하는 불경한 생각도, 견딜 수 없어하던 즈음.


남자친구 부모님께 인사차 한국에 와 있던 딸이 남자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의성으로 내려온다고 했다.


분명 데이트는 하는 것 같은데 서른이 다 되어 갈 때까지 결혼에 관심을 끄고 사는 딸이 혹시 비혼주의자는 아니가 하는 의심이 들어 걱정과 함께 조바심을 내던 차였다.


엄마 대신, 언니 대신 어느새 손에 익은 집안일이지만, 여러 갈래로 산발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새도 없이

엄나무 순을 데쳐 무치고, 양념장을 갈무리하고 서둘러 기차역으로 아이들 마중을 나갔다.


플랫폼에서 딸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피곤했을 텐데도 환한 딸의 얼굴, 그 옆엔 청년이 서 있었다.

어쩌면 곧 사위가 될지도 모를 사람.


우리는 함께 늦은 아침을 먹었다.

조카가 자랑하던 ‘에르메스급’ 식빵에 커피 한 잔.

소소한 농담이 오가고, 조용한 웃음이 번졌다.

조금 어색하던 식탁이 점점 따스해졌다.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방앗간을 둘러본 뒤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잠을 주무시듯 조용히 누워 계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엄마의 손을 잡고 딸의 남자친구를 소개했다.

“엄마, 우리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귀 가까이에 대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버지 만나면 전해주세요. 축복해 달라고.”


잠시, 엄마의 눈이 아주 잠깐, 아주 희미하게 떠졌고,

그게 전부였지만 충분했다.


그날, 큰언니와 형부, 조카, 작은딸, 딸의 연인.

좀 어색할 수도 있었던 조합은,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엄마를 뵈러 가는 짧은 시간 속에서

조금씩 우리는 좀 더 친해지고 끈끈해 있었고,


의성 특산물인 흑마늘을 먹인 한우로 유명한 ‘덕향’에서

한우, 육회, 냉면으로 다시 한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 큰언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딸은 예뻤고, 청년은 고맙고 귀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차창 밖으론 산불로 그을린 산자락 사이 연둣빛 아가들이 새순으로 돋아나고 있었다.

4월의 풍경이, 그 나른한 저녁처럼 조용히 흘러갔다.


찰나의 어느 순간, 겨우 뜬 듯한 엄마의 희미한 눈이 문득문득 떠올랐고

문득문득 눈물이 고였고

그러다 히죽히죽 미소 지었다.


사는 일이 꼭 수채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긋불긋 만개했던 영산홍이 퇴색되어 사그라드는 그 사이 어디쯤, 뜻밖의 색감이 번져 나오는 것처럼.


슬픔과 기쁨이 가슴 저린 하루.

찬란하고 뽀송뽀송한 그들의 청춘이 사그라져 가는 엄마의 임종과 겹쳐져

나의 인생을 다채롭게 물들이고 있었다.


한 생의 끝자락과 다른 생의 시작이 겹쳐질 때,

인생은 서러워도 지고 아름다워지기도 하는가 보다.

그 모순, 그 아이러니가 또 나를 울게 한다.


곧 다함없는 그리움이 될 엄마가 벌써 그립고,

딸의 걸음은 더욱 사랑스럽다.


나의 삶 어디쯤,

나는 오늘이라는 풍경을 오래도록 기억하려 한다.


사는 일이, 수채화처럼 번져가는 오늘을.

keyword
작가의 이전글호모파베르와 까마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