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거쳐간 직업들
“제군들, 밀가루 반죽과 찐빵의 차이점이 뭔지 아는가?”
대학교 1학년 첫 수업, 교수님의 첫마디, 첫 질문이었다. 대답은 이랬다.
“찐빵은 완성품이지만 밀가루 반죽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만들기에 따라 칼국수도 될 수 있고, 수제비나 단팥빵도 될 수 있어. 나는 이미 찐빵이지만, 여러분은 무한한 가능성(포텐셜)을 지닌 밀가루 반죽인 셈이지.”
그 말은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찐빵이건 칼국수이건, 어서 빨리 그 ‘무엇’인가가 되어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장애인을 가르치는 특수학교 교사가 되었다.
대부분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기에 힘들지만 뿌듯하고 보람된 순간들도 많았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목사인 남편을 따라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오게 되면서 교사라는 직업은 접어야 했다.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만큼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 환경 속의 삶이었지만, 11시간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야 했던 지난한 여정만큼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고, 영어라는 언어의 벽은 높고 아득했다.
한국에서의 교사 경력은 무용지물이 되었기에 이민 목회를 하는 남편을 도우며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나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일을 했다.
처음 몇 달은 이웃집 아이를 돌보는 베이비시터 일을 했다. 이후에는 일식집 웨이트리스, 음식을 만드는 케이터링, 콩나물과 두부 공장의 팀장으로 일했다.
그러다 무작정 전문직에 도전하고 싶은 갈망이 찾아왔다. ‘일요일에 쉴 수 있는 직장’이라는 단순한 조건 하나로 CDA(Certified Dental Assistant), 치과 간호사가 되기 위해 칼리지에 등록했다.
영어로 된 교과서를 구글 번역기를 돌리고 사전을 찾아가며, 남편의 코 고는 소리와 멀리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아련해질 때까지 밤새워 공부했다. 어찌어찌 1년의 과정을 마치고 보드 시험을 통과해, 드디어 치과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름 전문직장인으로 7년의 경력을 쌓았다.
아이들은 나의 손길이 없어도 될 만큼 성장했고 나 역시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 되자, 더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었던 또 다른 직업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공부량도 CDA에 비하면 2.5배 이상, 총 8학기, 방학 없이 꼬박 2년이 걸리는 과정이었다. 어떤 이들은 하던 일을 줄이거나 마무리하고 노후를 준비할 법한 50이 훌쩍 넘은 나이였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다시 한번 도전에 나섰다.
예상대로 쉽지 않았지만, 딸들보다 더 어린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특권이라 긍정하며, 예상외로 즐겁게 2년의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주정부에서 주관하는 실기·필기시험을 통과하고 클리닉에서 일한 지 벌써 5년, 좀 쑥스럽지만 이제는 자타가 인정하는 베테랑 RMT(Registered Massage Therapist)가 되었다.
“전직은 특수학교 교사, 웨이트리스, 베이비시터, 목사 사모, 콩나물·두부공장 팀장, 덴탈 어시스턴트,
현직은 RMT,
평생직은 엄마지.”
"엄마 도데체 직업이 몇 개야?"라고 묻는 딸들에게
지금도 뭔가를 궁리하고 도전하고 싶어 하는 나의 대답이다.
소박하게는 생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좀 철학적으로는 자아실현의 방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전해 온 다양한 도전과 일들 속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충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용기 내어 도전한 그 일터들은
눈물샘 없는 고래도 울게 할 만큼
척박하다는 이민목회 목사의 아내였던 내겐
오롯이 나 자신만의 호흡을 내쉴 수 있도록 해준 한줄기 숨구멍이 되어주었고
아직도 나의 영어 실력은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영어로 공부를 마치고 전문직을 갖게 된 아이들의 엄마로서
딸들의 작은 프라이드가 되어 주었다.
PS: 경험하고 거쳐왔던 수많은 도전과 일들 속 희로애락에 대해선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