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그렇게 이어진다

이별과 시작이 겹쳐진 하루

by 에우름

출산 예정일을 3주 앞두고 은지의 육아 휴직을 시작한 첫날이었다. 점심 무렵, 은지는 갑자기 “배가 아파.” 하며 놀란 얼굴로 강아지 밍키를 맡기고 신랑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배불뚝이 은지는 민망한 듯 웃으며 “저녁 먹고 쉬었다가 오래.”라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게 웬일이니? 육아휴직 첫날에.” “나 3주쯤은 느긋하게 준비하고 싶었는데.” “아기 침대와 장롱도 아직 조립 못 했는데 어떡하죠?” 우리는 설렘과 당황을 주고받으며 갑작스러운 상황을 맞았다.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병원으로 갔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문이 닫히자 마음이 조여 왔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채 밍키를 꼭 껴안았다. “언니 힘내라고 기도하자.” 그 순간 카톡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한국에 있는 작은언니가 보낸 메시지였다. “엄마가 6시에 하늘나라로 편안히 가셨어.” 캐나다 시간으로는 2022년 9월 16일 오후 7시, 한국은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 ‘떠나셨구나. 많이 아프지는 않으셨나?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은지랑 아기는 괜찮을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혼란스러운 순간이면 늘 숨을 고르고 ‘잠시 멈춤’을 한다. 가만히 앉아 머릿속을 텅 비우면 혼탁한 부유물들이 차츰 가라앉고 가려져 있던 마음이 드러난다. ‘그래, 떠나는 엄마 곁에는 오빠와 언니들, 손주들이 함께하고 있어. 하지만 곧 태어날 아기 곁에는 지금 나밖에 없어.’ 나는 가족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은지가 지금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갔다고 알리며, 엄마에게는 이곳 캐나다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 심장이 꾹꾹 눌렸다. 밍키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니 서늘한 저녁 공기가 숨 속으로 들어왔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말했다. “엄마, 잘 가!”


9월 17일 새벽 1시. 현우가 “어머니, 아기 보세요.”라는 말과 함께 사진을 보냈다.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온 작디작은 아기, 그리고 핼쑥하고 핏기 없는 은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엄마가 된 딸에게도 품어야 할 깊은 인연이 생겼다. 막 새 생명을 안은 은지에게 아픈 이별의 소식을 전하는 건 망설여졌다. 할머니가 떠나신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지현이에게만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전했다.


아침, 근처에 사는 지연이와 상준이가 아기 침대와 아기 장롱을 조립해 주었다. “할머니한테 가보셔야죠?” 상준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가면 은지와 아기는…” 나는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고 두 사람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연이는 곧장 갓난아기 옷을 위해 세탁기를 청소했다. “엄마, 젖병하고 기저귀도 필요해. 내가 사 올게.” “처음에는 모유를 못 먹을지도 모르니 신생아용 우유도 준비해야 해.” 선배 엄마로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세심한 일들을 챙겼다. 은지 곁에 그런 자상한 언니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지연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큰딸이 오늘 엄마에게 필요할 것 같다며 사다 둔 것이었다. 긴 하루가 지나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세탁기 소리만 드르륵거릴 뿐이었다. 스탠드의 노란 불빛이 비치는 은지네 거실에서, 무릎 위에 잠든 밍키와 단둘이 앉아 있었다. 마음 안에는 아직 멈추지 않은 하루가 남아 있었다.


‘엄마가 떠나셨지. 몸이 너무 약해져서 바다 건너 내가 사는 집에도 못 오셨는데, 지금은 자유롭게 날아오실 수 있겠다.’ 혹시 들으실까 싶어 목소리를 내보았다. “엄마, 저 은지 걱정하지 않았어요. 오셔서 곁에서 지켜주실 테니까요. 이제 저도 보실 수 있겠죠?”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오래 아프셨던 탓일까, 많은 연세 때문일까.


나의 받아들임은 삶의 끝과 시작이 동시에 내게 다가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엄마의 떠남과 손주의 태어남은 하나의 숨결처럼 맞닿아 있었다. 시간이 다한 별빛은 말없이 어둠 속에 가라앉고, 여린 빛 하나가 새로이 비추고 있었다. 나는 그 우주의 순환 안에 서 있었다.


“긴 삶의 여정을 마치시느라 애쓰셨어요. 나누어 주신 따뜻했던 사랑과 시간들, 오래도록 기억할게요. 엄마,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날 밤, 나는 엄마와 작별했다. 남은 맥주를 천천히 마셨다. 세탁기 소리만이 낮게 울렸다. 그 고요 속에서 마음은 차분해졌다. 생명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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