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세상이 아니랍니다
18년 만에 다시 한국에 살게 됐다.
지나가는 여행자가 아니라 한동안 이 아파트의 주민이 되었다.
재활용 종이박스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옆집 아저씨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고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나는 1층, 아저씨는 B1.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쳤다.
이럴 땐 뭐라고 인사하고 내려야 하나.
‘안녕히 계세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는 것도 아닌데. ‘들어가세요.’ 집으로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좋은 하루 보내세요.’ 왠지 카톡 인사 같다. 자연스럽지 않다.
1층 도착. 나는 가벼운 목례를 하며 말했다.
“먼저 내리겠습니다.”
좋다. 무난한 선택이었다.
위층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치원생 형제와 출근길로 보이는 엄마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로 인사를 나눴다.
개구쟁이들을 보니, 지금 이 워킹맘에게는 인내심이 필요한 시기일 듯했다.
이번에도 고민이 시작됐다.
‘애쓰시네요.’ 처음 보는 내가 할 말은 아니다.
‘안녕히 가세요.’ 무슨 이별을 하나.
‘얘들아, 오늘 재미있게 보내~’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에 비해 너무 해맑다.
결국, “먼저 내려요.” 하고 작게 웅얼거리며 내렸다.
친구에게 물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해?”
친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꼭 해야 돼?”
“그래도 이웃인데 인사하면 좋잖아?”
친구는 간단히 정리했다.
“하고 싶으면 그냥 ‘안녕히 가세요’ 하면 되지.”
그리고 마지막에 결정타를 날렸다.
“생각이 너무 많아, 넌.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아? 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맞는 말이다. 내가 배워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웃음과 유머가 있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꼭 누군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친구의 조언대로 나만의 맞춤형 인사를 건넨다.
머리를 단정히 묶은 아이와 엄마에게 “머리 너무 예쁘게 땋았네요.”
가족끼리 옷을 맞춰 입은 부부에겐 “너무 보기 좋아요.”
그렇게 그때그때 느껴지는 내 마음을 전한다.
처음엔 닫혀있던 얼굴이 슬그머니 풀리고
내릴 땐 ‘안녕히 가세요’라는 다정한 인사가 돌아온다.
며칠 전, 아파트 앞에서 젊은 남자가
내게 먼저 인사를 해왔다.
나의 쭈삣거림을 눈치챈 그가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자전거...”
'아, 기억났다.'
얼마 전 얼굴 전체 마스크를 쓰고
자전거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던 남자.
“안 더우세요?”
“바람 불면 괜찮아요. 살이 좀 쪄서요.”
“멋있어요.”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가 고맙게 아는 체를 해줬다.
어제는 전에 보았던 통통한 남자아이가
나를 알아보고 씩씩하게 인사해 주었다.
꼬깔콘을 들고 있던 나는 물었다.
“같이 먹을래?”
“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과자 봉지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마음을 조금씩 전하는 인사 덕분에 이방인이 정다운 이웃이 되어가는 중이다.
순간의 미소, 마음을 채우는 천연 비타민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누는 미소와 꼬깔콘 한 봉지처럼, 따뜻하고 두터운 마음들이 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