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 그리는 지도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남는 법

by 에우름

‘지도 제작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지도가 정확해질 때까지 계속 고쳐 그려야 한다는 데 있다.’
스콧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에 실린 이 문장은 내 삶의 공식을 근본부터 바꾸게 했다. 40대의 내가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할 때면 주저 없이 이 책을 내미는 이유다.


경직된 사회와 보수적인 가정이 합의한 세상에 의문을 달았던 나는 늘 까탈스럽고 유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관계의 힘은 따뜻함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개인의 독립성과 사고의 자유를 억누르기도 했다. 그렇게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는 ‘선명함은 이기적이다’라는 말 앞에서 점점 흐려졌다. 그 문화에 흡수된 나는 불안을 내 탓으로 돌리며 자책했고, 결국 외로운 회피를 선택했다.


이런 아슬아슬한 감정을 붙잡아준 것은 니체였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 언어는 남이 그려 준 지도를 버리고, 내 손으로 나만의 지도를 다시 그려도 된다는 허락 같았다. 나는 그제야 외면해 온 나의 길을 인정했고 처음으로 나로 살아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었다.


‘재창조’와 ‘끊임없는 지도 그리기’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내게는 이미 젊은 시절 그려 둔 지도가 있었지만 마흔을 앞둔 나에게 맞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했다. 완벽해 보이는 한 장의 지도가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곡선 계단 뒤의 삶 전체를 안내해 줄 수는 없다. 나이와 사고의 변화 그리고 내가 서있는 자리를 따라 지도를 수정해야만 그 뿌연 길을 지나갈 수 있다. 책임은 분명 무거웠지만 가야 할 방향을 모르는 막막함보다 한 걸음씩 힘들고 더디게 나갈지라도 내 길을 걷고 싶었다.


돌아보면 나는 종이지도를 좋아했다. 한국 일본 캐나다 새로운 곳에서는 언제나 가장 먼저 도시 전체가 담긴 큰 지도를 샀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도책을 들고 공원을 걷다 보면 낯선 곳도 이내 익숙해졌다. 내비게이션은 편리하지만 길은 쉽게 잊힌다. 지도의 지점을 하나하나 짚을 때마다 나의 세계는 조금씩 확장되었다. 그 길 위에서 남의 시선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오직 나에게만 집중했다. 그 경험은 내 삶의 지도에 밑그림이 되었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딸에서 엄마 할머니가 되기까지. 나의 시간은 한국과 캐나다 그리고 또 다른 낯선 곳을 배경으로 흘러왔다. 때로는 안개처럼 흐릿했고 익숙한 언어조차 낯설게 들렸다. 그 혼란 속에서도 나만의 지도는 기준점이 되어주었다. 내 안에 떠도는 표식을 해석하며 수많은 선택과 실수 속에서 덧칠해 온 좌표였다. 내 삶은 그렇게 한 권의 두꺼운 지도책으로 완성되어 왔다.


이 책을 읽은 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나는 지금도 나만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인생이 끝나지 않는 한 지도 그리기는 멈출 수 없다. 물론 지도가 있다고 길이 쉬워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의지와 실행 사이의 간극을 좁혀 가는 그 꾸준한 실천은 내 삶을 이끌어 온 보이지 않는 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