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보다 깊은 이름, 존재로서의 삶
“행복이란 사물이나 소유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고독을 지나 독립을 배우며 비로소 삶의 조화를 경험한다고 보았다. 그는 그래서 ‘행복’보다 ‘웰빙’이라는 말을 더 사랑했다.
— 엔스 푀르스터, 『에리히 프롬』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한 편의 연극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이 쓴 대본을 연기하는 배우이며 동시에 그 무대를 이끄는 연출가로 살아간다. 선택의 여지 없이 올려진 1막은 거침없이 시작되고, 끝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설픈 열정으로 과장된 몸짓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기도 한다. 다른 이의 무대를 흉내 낼 수도 있겠지만, 끝까지 끌고 가야 할 연극은 결국 나의 것이다.
사랑이 스민 책임감이었을까 아니면 책임이 머문 사랑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딸들의 새로운 무대에서는 조연으로서 ‘엄마’라는 역할에 깊이 몰입해 왔다. 그 조연은 내 삶에서는 오히려 주연의 자리였고 그 사이의 균형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딸들은 각자의 무대로 걸어 들어갔고 남은 무대에는 이제 나만의 독백이 남는다.
새로운 막이 열리자 조명도 달라지고 배경도 바뀌었다. 나는 또 다른 나의 역할에 다시 몰두한다. 어떤 결말이어야 박수가 있는 커튼콜이 될까. 어쩌면 그 박수조차 남이 아닌 나 자신이 보내는 환호일지도 모른다.
프롬의 말처럼 웰빙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살아내는 상태일 것이다.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 자신의 의지와 소망으로 만들어 가는 삶, 그것이 내가 이 무대에서 지키고 싶은 태도다.
몇 막인지는 알 수 없지만 끝은 있다.
“잘했어. 괜찮은 무대였어.”
“멋있는 무대였다.”
그렇게 스스로의 어깨를 톡톡 다독일 수 있기를.
나의 삶은 나만의 모노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