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 힐링 담론 : 잊지 못할 순간
11:12 am.
아… 아… 아아악!
찢어질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분만실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2013년 막 더위가 시작할 즈음, 나는 남산만큼 불러온 배를 움켜쥐고 안절부절 견딜 수가 없었다. 반짝이가 슬며시 자궁 아래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밑까지 내려왔다. 수박같이 크고 묵직한 것이 밑에 끼었다가 이내 밀고 나오려는데 나는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웠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됐다.
“아으. 악!”
나도 모르게 괴성을 질렀다.
“선, 선생님! 진통이요! 애가 나오려고 해요.”
옆에서 초코파이를 먹으려다 당황한 남편은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간호사실로 달려갔다. 나는 눈앞이 까마득했다.
며칠 전, 출산 예정일을 코앞에 둔 진료실에서 담당 의사는 내게 자궁 문이 40%가 열렸다고 했다. 그때 의사 선생님께서 두 번째 출산이기도 하고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빠르다며 유도 분만을 권했다. 혹시 집에서 진통이 시작된다면 병원으로 오는 길에서 아기를 낳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내게 으름장을 놓았다. 유도 분만이라니 왠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 같아 꺼림칙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행여 당혹스러운 상황이 생길까 싶어 그리하기로 했다.
10:00 am.
나는 가족과 함께 어느 산부인과 병원 분만실로 들어왔다. 처음 가족분만실에 들어섰을 땐 마치 호텔에 온 듯 설레었다. 하얗고 널찍한 자동 침대를 가운데 두고 침대 정면에는 대형 벽걸이 TV가 걸려있었고 벽 쪽으로 짙은 갈색 소파와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일반 분만실에서 정신없이 출산했던 첫째 때와 달리 깔끔하게 정리된 가족분만실은 독립된 공간이라 그런지 아늑함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 위에 올라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천장에는 창문을 연출한 듯 금빛 몰딩 너머 푸른 하늘과 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었다. 언 듯 ‘저 파릇한 하늘이 노래져야 여기서 나갈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아이가 밖에서 기다리는 사이 의사는 휘젓듯 내진을 하였다. 통증이 스치듯 지나갔다. 곧이어 태동 검사를 하고 유도 촉진제를 맞았다. 간호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곧 진통이 시작될 거라고 했다. 바짝 긴장됐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무통 주사를 맞고 싶다고 했더니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라 지금은 의미가 없다며 간호사가 잘라 말했다.
아뿔싸! 첫 분만 때처럼 이번에도 날로 틀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이 배가 되었다. 나는 무통 주사와 연이 없는 게 분명했다.
“산모님, 어때요? 통증 있어요?”
간호사가 혈압과 맥박을 살피며 말했다.
“아뇨. 아직….”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간호사가 다시 물었다.
“어, 이상하다.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진짜 안 아파요?”
“뭐…. 그냥 괜찮네요.”
간호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소파에 앉아있던 남편에게 진통이 오면 불러달라고 한 뒤 분만실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통증은 오지 않았다.
남편이 간식을 사서 오겠다며 아이와 함께 나갔다. 혼자 남겨진 분만실은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의 전주처럼 고요했다.
11:12 am
잠시 후, 남편이 아이와 함께 들뜬 표정으로 분만실로 들어왔다. 아이가 좋아하는 초코파이며 간식거리를 사 왔다며 테이블 위에 봉지를 올려놓았다. 나는 아침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내심 미안했는데 잘했다며 서둘러 먹으라고 말했다. 부스럭부스럭 봉지 뜯는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아, 아!”
똥이 나오려는 듯 아랫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하더니 점점 통증이 심해 왔다. 마침내 진통이 왔다.
“여보!”
진통 간격이 좁아졌다. 아랫배가 뭉치더니 출산이 임박했다고 몸이 신호를 보냈다.
“빠, 빨리! 아 악!”
나는 평소 아픈 것도 잘 참는 편이었는데 이렇게 큰 소리를 지를 줄은 몰랐다. 남편은 당황한듯하더니 다급하게 간호사실로 뛰어갔다. 양수가 터진 것 같았다. 분만실 안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반짝이가 나올 것만 같았다.
“산모님! 힘주지 마세요!”
간호사가 급히 분만실로 달려오며 말했다.
“지금은 힘 빼시고 호흡하세요!”
간호사는 심각한 얼굴로 묵직한 수박 덩어리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손으로 막았다.
“아, 씨.”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선생님께서 외래 진료 중세요. 방금 콜 했으니 곧 오실 거예요.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요.”
나는 또 힘주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힘 빼 라는 말은 처음이었다. 이 신성한 고통을 어떻게 참을 수 있는지 상상이 안 갔다. 호흡을 길게 할수록 아랫도리에 있는 수박 덩이는 거부하는 것 같았다.
“빨리. 빨리! 의사!”
일 분이 백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오려는 자와 못 나오게 하려는 자 가운데 끼여 저세상 고통을 느끼며 몸부림치고 있을 때 드디어 담당 의사가 도착했다. 분만실 안이 더 바쁘게 돌아갔다.
“어이쿠, 벌써 나오네.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일도 드물어요. 아기가 효자네요. 자, 이제 힘주세요.”
나는 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있는 힘껏 용을 썼다. 사지가 배배 꼬이는 듯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 몇 번 반복되었다.
11:27 am.
진통이 시작되고 15분 후,
윽!
외마디 비명과 함께 뜨끈하고 시원하게 무언가 아래로 쑥 빠져나갔다.
응애, 응애!
아이 울음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의 절정처럼 분만실 가득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축하의 인사가 쏟아졌다. 어디선가 박수갈채가 들리는 듯했다.
15분!
전쟁이 지나간 듯 한바탕 수선스럽던 분만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