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 힐링담론 : 어린 시절의 추억
“로니야! 일나라~ 밖에 비온데이.”
방문 너머 희미하게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가 아침 단잠을 깨웠다.
‘아, 진짜로? 비... 싫은데...’
나는 천천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갔다.
양손으로 턱을 괴고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촤촤촤 촤.
비가 마당을 두들겼다.
부스스한 눈을 두어 번 비비고 난 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보았다.
추르륵. 추륵. 추르륵.
천정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마구 쏟아졌다. 빗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7월의 장맛비는 지겹지도 않은지 자꾸 만나자고 성가시게 졸라댔다.
장마철, 오늘은 정말 학교 가기 싫은 날이다.
“로니야, 그러다 진짜 늦는다.”
엄마는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와서 마루에 쓱 올리셨다. 찌그러진 은색 세숫대야 안에는 낮게 깔린 물이 찰랑거렸다.
"아홉 살이면 이제 알아서 해야제. 언능!"
멀뚱히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답답하셨던지 엄마가 재촉하듯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세숫대야로 몸을 밀착시켰다. 손바닥이 담길 듯 말 듯. 나는 물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물이 찼다. 한 손만 쓰기로 했다. 왼손으로 물을 퍼올린 후 양 볼을 번갈아가며 문질렀다.
엄마가 수건을 목에 걸어주셨다. 수건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꿉꿉한 냄새가 났다.
나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와 옷장 서랍을 열었다. 연두색 반바지를 먼저 꺼내고 하얀 양말을 잡었다. 서랍 문을 닫으려다 다시 양말 하나를 더 꺼냈다. 책가방에 양말을 챙겨 넣었다. 일종의 비 오는 날 의식처럼.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뜨락에 서서 하늘을 향해 우산을 활짝 펼쳤다.
촤라락~~~ 촤!
빗소리가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장대비가 우산 위로 쏟아졌다. 비는 미친 듯이 우산 미끄럼을 탔다.
나는 마당을 가로질러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동구 밖을 나와 아스팔트 길로 들어섰다. 이대로 학교까지 1시간여를 걸어가야 한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아스팔트 위에 개구리와 지렁이가 쭉 뻗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비 온다고 산책 나왔을 개구리와 지렁이. 너네 엄마가 목 빠지게 기다리겠다. 논에는 어린 벼 이삭이 머리를 산발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농사꾼은 일 년 농사가 허사가 될까 걱정이 늘겠다. 모두 여름 장맛비 짓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처 억척, 처 억척.
흰 운동화가 점점 무거워졌다. 작년 추석 때 장에서 엄마가 사주신 반짝이 홀로그램이 있는 운동화.
“에잇, 참! 찝찝해."
나는 젖은 운동화를 보니 짜증이 났다. 집에 가면 소죽 아궁이 앞에 놓고 말려야겠다.
이번 장날에는 엄마가 꼭 장화를 사주시면 좋겠다.
초아악-
자동차가 지나가다 물세례를 퍼부었다. 우산은 물폭탄을 막지 못했다.
나는 자동차가 뿌리고 간 빗물을 툭툭 털어내는데 무척 속이 상했다.
새하얗던 양말은 어느새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회색빛으로 변했고 연두 바지 위에는 황톳빛 점무늬가 생겼다. 얄미운 장맛비는 잦아들 기미도 없이 계속 쏟아졌다.
내 눈에도 비가 내릴 것 같다.
학교 가는 오 길, 정말 싫은 날.
나는 우산대를 꼭 쥐고 다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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