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신발의 하루, 세렌디피티가 찾아온 제주

by 차밍

여행 6일차.


밤새 폭우가 내 텐트를 마구 때렸다.

텐트 천을 뚫어버릴 듯 쏟아지는 빗속에서, 겨우 밤을 버텼다.


날이 밝아오자 다행히 비는 그쳤다.

하지만 텐트 방수천 아래 두었던 운동화는 흠뻑 젖어 있었다.

방수천 아래 두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비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행 내내 신을 운동화는 이것 하나뿐.

젖은 신발을 신을 생각을 하니 아침부터 찝찝함이 밀려왔다.

별 수 없이 물먹은 운동화를 신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운 안락한 실내에서 편하게 시간을 보낼 곳이 필요했다.

서귀포 시내의 한 카페로 향했다.

아침 9시, 올레시장 옆에 자리한 카페에 도착했다. 빗속 야영을 끝낸 내게 이곳은 잠시 천국 같았다.

아메리카노 한 잔과 베이글을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아 태블릿을 켰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카페라는 공간은 잠시 숨을 고르기에 최적이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글을 쓰며 다음 일정을 생각할 수 있다.

이곳에서 두어 시간 머물렀다.


카페에서 어느정도 다시 여행할 채비를 마친 뒤,

비가 온 뒤에 가면 장관이라는 ‘엉또폭포’로 향했다.

챗gpt를 통해 지금 내가 있는 카페에서 근처 가볼만한 곳을 검색한 후, 즉흥적으로 결정한 일정이었다.


폭포 입구부터 사람이 많았다. 전날 밤새 내린 비 덕분에 폭포는 엄청난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물안개를 머금은 거대한 폭포를 바라보니 해외에서 보던 유명 폭포와도 견줄 만한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엉또폭포를 뒤로하고 다시 차를 몰았다. 방향은 정해두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간 끝에, 서귀포 강정여객터미널에 닿았다.

하지만 신발은 여전히 질척였다. 맨발로 걸을 수도 없어 슬리퍼를 사고 싶었지만, 이 근처에서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서 뜻밖의 풍경들을 만났다.

안개를 머금은 유람선이 웅장한 실루엣으로 바다 위에 떠 있었고,

넓게 펼쳐진 제주 바다 위로 파도들은 떼를 지어 몰아오듯 내륙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자연의 거대한 스케일 앞에 작은 내가 잠시 멈춰 섰다.


이 모든 풍경이 스펙터클하고도 위대했다.

아무 계획 없이 떠돌다 발견하는 장소들이었다. 이번엔 정말 ‘세렌디피티’였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소박한 어촌 건물 안 '신선국수'라는 작은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신선국수라는 말이 뭔가 맛집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으로 들어가서 콩국수를 주문했다.


가게 안에는 청년 한 명과 노부부가 식사 중이었고, 아주머니 한 분이 주방안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곧 나온 콩국수는 기대 이상이었다. 고소하고 시원한 국물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때의 콩국수가 생각나면서 입안에 침샘이 터지려고 한다.

너무 맛있어서 식사 후 아주머니께 감탄을 전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무뚝뚝한 미소 없는 응대였다.


‘원래 성격이 그러신가 보다’ 생각하며 자리를 나섰는데, 잠시 뒤 물건을 두고 온 걸 깨닫고 다시 들어갔다. 그때 아주머니는 주방 안에서 그릇을 들고 맛있게 식사 중이셨다.

내가 '물건을 두고 와서 다시 가지러 왔다'고 말씀드리자 그때 웃으면서 인사해주셨다.


그 모습을 보고 아주머니가 원래 표현이 무뚝뚝하신 편이셨구나라는 걸 알게 됐다.

무뚝뚝한 모습만 보고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이런 숨은 맛집은 검색으로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확률은 높지 않지만, 이렇게 발길 닿는 여정을 따라가야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곳 신선국수도 다음에 제주도에 오게 되면 아마 또 들르게 될 것 같다.


식사를 마친 후 캠핑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캠핑용 버너를 사기로 했다.

길을 달리다 '서귀포 혁신도시'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라면 캠핑용 버너도 판매할만한 큰 마트가 있을 것 같았다.


도착한 혁신도시는 정말 신도시 느낌이 물씬 났다. 대형 마트와 넓은 도로, 월드컵 경기장까지.

며칠 동안 자연 속에 머물렀던 터라 잠시 이런 도시 분위기가 반가웠다.

제주에서도 내륙 대도시에서 누리는 도시의 삶이 가능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서 캠핑버너와 등심덧살을 구입하고 야영장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밤, 캠핑용 버너에 고기를 구워 막 지은 밥과 함께 먹었다.

간단한 식사였지만 캠핑 분위기와 맛까지 모두 챙긴 하루를 마무리하는 최고의 만찬이었다.

무려 5만원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캠핑용 버너를 산 보람이 있었다.


텐트 안에는 여전히 습기가 남아 있었고, 결국 새벽 2~3시쯤 선잠에서 깼다.

이대로 텐트 안에서는 더이상 누워있기 힘들어서 침낭을 들고 차로 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

이불 없이도 침낭만 있으면 차 안에서 편히 잘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젖은 텐트에 있다보니 차 안이 평소보다 더욱 아늑하고 편하게 느꼈던 것 같다.


젖은 신발로 하루를 보낸 건 불편했지만,

대신 뜻밖의 멋진 풍경들과 고소하고 시원했던 한 그릇의 콩국수,

깔끔하고 현대적인 제주 신도시의 풍경 그리고 저녁에는 캠핑분위기를 내며 혼자 만들어 먹은 소박한 요리까지.

어쩌면 이런 예기치 못한 순간들이 여행의 진짜 선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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