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와 라모의 '탱부랭'
영화감독 이전에 비평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인 박찬욱 감독을 좋아한다. 그가 쓴 비평집은 닳도록 읽었던 기억이 있다. 철학을 전공한 그답게 조곤조곤 적확하게 말하는 것도 좋고, 진지함 사이사이에 쓰는 유머도,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을 하는 그의 제스처도 좋아한다. 또한 클래식 마니아로 영화에 음악을 입히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이기에 사실 그를 안 좋아할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다. 다만 인간적인 면으로 그를 대하는 마음과 달리 그가 만든 영화를 들여다보는 것은 내게 용기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아가씨> 같은 영화가 그렇다.
영화 <아가씨>는 영국의 소설가 사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가 원작이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2016년 칸느 영화제에 초대됐다. 주인공 히데코 아가씨를 연기한 배우 김민희부터 하녀 숙희 역의 김태리, 조선인이지만 일본 귀족이 되고 싶었던 이모부 코우즈키 역의 조진웅, 사기꾼 후지와라 백작 역의 하정우를 중심으로 조연, 단역까지 스크린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영화에 필요한 장치였다. 감독의 특별한 시각적 감각이 돋보인 미장센(mise-en-scène, 무대 위에서의 등장인물의 배치나 무대 장치, 조명 등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과 카메라 앵글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영화였다.
줄거리는 일찍 고아가 돼서 후견인 이모부 보호 아래 살고 있는 귀족 아가씨의 이야기다. 아가씨는 몰락한 귀족 집안의 후손으로 상속받을 재산이 꽤 많았다. 이모가 죽은 이후에는 재산을 탐한 이모부와 사기꾼 백작 그리고 그 백작과 한패인 하녀 숙희가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들은 각자의 목적을 갖고 상대를 속이고 이용하며 얽히고설킨 관계다. 이모부는 집안에 온갖 외설서를 들여다 놓고 부인에게 외설서의 낭독과 실감 나는 연기를 하게 만들더니, 이모가 죽은 후로는 어린 조카 히데코에게도 같은 일을 시키며 성적 학대를 한다. 이런 낭독회를 통해 비싼 값에 외설서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 것이 이모부의 돈벌이다. 한편 하녀 숙희는 마음 둘 데 없는 히데코 아가씨를 진짜 아기 대하듯 친절하게 진심으로 대하면서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두 여인은 서로에게 힘이 돼준다. 히데코는 하녀 숙희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고 하며 그녀를 의지하고 사랑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두 여인은 외설서를 찢어 물에 담그며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고, 이모부와 백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상해로 탈출하여 서로를 구원한다.
낯선 장면에 흐른 낯선 음악, 라모의 탱부랭
영화 <아가씨>의 음악은 각 장면마다 다양한 뉘앙스로 쓰였다. 1932년에 작곡된 ‘세기말의 노래’와 1974년에 이필원 씨가 작곡한 ‘임이 오는 소리’, 장 필립 라모의 ‘탱부랭’,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오중주 가장조 K.581 2악장’이 흘렀다. 이밖에도 조영욱 음악감독이 함께한 OST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후지산 아래서 온 저 나무’, ‘결혼식’ 또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조영욱 음악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네 인물의 충돌에서 형성되는 서스펜스를 유지하되, 아가씨와 하녀의 멜로가 바래지 않도록 두 큰 흐름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데 초점을 맞췄다" 고 말했다. 그의 안목 또한 영화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음악에 민감한 박찬욱 감독이니 그의 영화에 음악을 삽입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영화에 수록된 곡 중 이번에 소개할 곡은 라모의 ‘탱부랭’이다. 이 곡은 작곡가도 곡 제목도 낯설다.
장 필립 라모(1683~1764)는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작곡가다. 사실 라모의 작품을 즐겨들을 정도라면 이미 클래식 마니아 중에서도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라모는 프랑스의 국민적 오페라와 발레를 발전시키고 음악이론가로서 근대 화성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던 그는 일찍부터 하프시코드(피아노의 전신 악기)와 오르간 연주자로 활약하였으며, 1706년에 <클라브생곡집 제1권>을 출판하였다. 1722년에는 <화성론>을 발간하고 1723년부터 파리에서 거주하면서부터는 극장에 내놓을 작품을 쓰기 시작하며 호평을 받았다. 서양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독일의 J. S. 바흐 등 많은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륄리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국민적 오페라-발레 양식을 더욱 발전시켰다. 독일의 바흐나 헨델에 견주어서도 부족함이 없는 그였지만 작품이 프랑스 밖에서 연주된 적이 별로 없어 안타깝게도 국제적인 명성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는 ‘라모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현대음악 창시자이며 르네상스 이후 최초의 프랑스 음악가이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는 그가 작곡한 하프시코드를 위한 작품집 1권 중 9번 ‘탕부랭’ 마단조가 흐른다. 탱부랭(tambourin)은 프랑스어로 활발하고 속도가 빠른 프랑스 춤곡 또는 그 춤을 말하며 통이 긴 북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단어에서 탬버린의 어원을 찾을 수 있다. 바로크 시대의 무곡은 모두 춤의 이름과 동일하다. 예를 들면 바흐의 모음곡에 자주 등장하는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 미뉴엣, 가보트 등도 춤과 춤곡을 의미한다. 라모의 ‘탱부랭’은 백작(하정우)이 낭독회에 가입하는 장면에서 흐르는데, 엉덩이 채찍을 맞는 장면에 바로크 음악이 흘러 상당히 낯설었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는 바로크 음악을 많이 썼지만 평소에는 교향곡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올드보이(2003)에 흘렀던 비발디 <사계> 중 ‘겨울’ 1악장도, 친절한 금자씨(2005)에 흘렀던 비발디 칸타타 <그만두어라, 모두 끝났다> RV. 684도, 박쥐(2009)에 흘렀던 바흐 칸타타 <나는 만족하나이다> BWV. 82 도 모두 바로크 음악이다.
고대부터 시작된 음악은 중세 천년의 암흑기를 지나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크로 발전한다. 바로크는 1600년에서 1750년 경까지를 말하는데, ‘찌그러진 진주,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지닌 포르투갈어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이전 시대에 비해 장식음이 많아 화려하게 들리지만 주로 2/4, 3/4, 4/4와 같은 단순한 박자들이 사용되고, 빠르기도 거의 일정해서 듣기에 편하다. 음의 반복이 많고 음이 진행하는 음역대가 넓지 않아 들으면서 다음 음이 미리 상상 가능하다. 이 때문에 바로크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안정된다. 라모의 ‘탱부랭’은 동요 ‘우박은 춤춘다’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개인적인 견해로 추축 해보건데 박찬욱 감독이 영화에서 바로크 음악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음악을 단순화시켜서 관객이 감상하는 데 감정의 밸런스를 맞추도록 하고픈 그만의 철학이 아닌가 싶다. 복잡하고 미묘한 스릴러 구조물일수록 음악은 최소한의 것으로 단순화 시킨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는 영화 <아가씨>의 강한 미장센과 인간의 속물 근성, 잊히지 않는 대사들과 배우들의 미묘한 눈빛까지 잔상이 가득히 남아 맴도는 와중에 라모의 ‘탱부랭’이 무한반복 재생되고 있다. 밝은 분위기의 동요로만 듣던 이 음악이 여기서 이렇게 흐를 줄이야.
역시 박찬욱이다.
<추천음반>
필립 글래스, 바흐 그리고 드뷔시와 라모 이렇게 3부작으로 선보인 음반이 모두 그라모폰 에디터스 초이스에 실리면서 젊은 음악가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이름은 더 널리 알려졌다. 1984년 생으로 아이슬란드 출신의 음악가인데, 자유로운 그만의 해석으로 청아한 피아노 음색을 들려준다. 캐나다 출신의 개성 있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처럼 스튜디오 레코딩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다.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칭찬했다는 그는 최근 국내에서도 팬들이 많아졌다.
Rameau: Tambourin
피아노 비킹구르 올라프손
영화<아가씨> OST 중 임이 오는 소리
(The Footsteps of My Dear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