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스맨'과 엘가 '위풍당당 행진곡'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영화 ‘킹스맨’이 만들어 낸 최고의 명대사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누구든 이 문장과 멋진 슈트를 입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킹스맨 해리(콜린 퍼스)를 기억할 것이다. 남자 주인공인 해리가 에그시(해리를 구하려다 죽은 킹스맨 요원의 아들)를 불량배들에게 구해내면서 했던 말이다. 킹스맨은 전설적 국제 비밀정보기구인데, 이 요원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훈련을 통과해야 한다. 에그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킹스맨 요원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고, 마침내는 악당 발렌타인을 대적해서 성공을 거둔다. 2015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젠트’로 뒤를 이어 몇 편의 후속작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첩보 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콜린 퍼스의 광팬으로서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콜린 퍼스는 나에게 배우이기 이전에 정말 멋진 영국 신사의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부터 ‘브릿지 존스의 일기’, 그리고 ‘킹스 스피치’에서 말더듬이 왕 조지 6세로 연기하며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에 맞춰 대국민 연설을 했던 장면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아있다.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와 절도 있고 품격 있는 태도로 보통의 첩보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매너남의 최상을 보여줬던 영화 킹스맨.
이 영화는 영화라는 장르에서 필요한 모든 재미난 요소들이 총집합되어 있었다. 탄탄한 스토리와 다양한 캐릭터 그리고 SF적인 요소와 인간의 존엄에 관한 단상까지. 마지막으로 엘가의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의 중간 멜로디가 바로 이 영화에 흐른다. 영화 속 악당 발렌타인은 사람들 목에 보안이식칩을 심었는데, 보안이식칩이 터지는 장면에서 이 곡이 나온다. 사실 사람들 머리가 터지는 굉장히 잔인한 장면인데, 얼핏 보면 음악적인 분위기 덕에 불꽃놀이처럼 흥겹게 보인다.
엘가의 음악이 흐르며 머리가 터지는 장면
위풍당당 작곡가 엘가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1857~1934)는 1888년 작곡한 op. 12의 ‘사랑의 인사’라는 곡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곡가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엘리스에게 ‘살루트 다 모르’, 우리말로 ‘사랑의 인사’라는 제목의 곡을 선물했다. 그는 영국 사람이지만 출판사의 권유로 프랑스어 제목의 ‘Salut d'amour 사랑의 인사’를 발표한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달콤한 사랑의 감정이 전해진다. 프랑스어 제목이 갖는 특유의 감미로운 느낌과 곡의 아름다운 선율이 굉장히 인상적인 곡이다. 피아노 독주곡이 원곡인데 요즘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 또는 첼로 독주곡이나 관현악 버전으로도 자주 연주된다. 다른 클래식에 비해서 길이도 길지 않고 3분 정도라 듣기에 편하다. 단순하면서도 평온한 멜로디가 듣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커피 향이 가득한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클래식이다.
엘가의 작품 중에서 그 곡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곡이 바로 ‘위풍당당 행진곡(Pomp and Circumstance Marches, Op. 39)’인데, 1901년부터 오랜 시간을 거쳐 작곡된 이 곡은 전체 6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번호 39 안에 6곡이 있고, 일반적으로 첫 번째 곡이 가장 유명해서 많이 연주된다. 가장 엘가답고 확실하게 엘가를 떠오르게 하는 곡이다.
엘가는 영국의 브로드히스에서 피아노 가게를 하는 가난한 조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부분 악기 파는 사람들이 조율을 같이 한다. 바흐가 음악가 집안이었고,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아버지, 하다 못해 브람스의 아버지도 악기 연주자인 것에 비하면 엘가 아버지는 연주자라기보다는 상인에 가깝다. 화가가 아닌 화방 주인이랄까? 연주자나 제대로 된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엘가는 음악을 접하며 컸다. 하지만 아버지는 엘가에게 음악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보다는 법률을 공부하길 바랐다.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던 것은 도리어 엘가 자신이었다. 예술가의 부모들도 현실적인 생계 걱정은 동일하다. 음악사에서 법률 전공하다 바꾼 위인들을 많이 만났다. 엘가 역시 법률 대신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엘가는 아버지 가게 점원이 돼서, 음악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았다. 음악가가 아닌 음악의 도구를 이용해 성실하고 근면하게 생계를 이었던 사람이다. 부드럽고 낭만적인 음악만 작곡했을 것만 같은 엘가는 결혼 전보다 결혼 후의 삶이 훨씬 성공적인 사람이다. 1889년 부인인 엘리스와 결혼을 하고서부턴 음악적으로 훨씬 성숙하고 훌륭한 음악적 성과물을 뽑는다. 당시 음악가들이 현대적인 기법으로 생소한 음악을 작곡한 것에 반해 엘가의 음악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5개의 곡은 전체 28분이 소요된다. 1번부터 4번까지는 1901년부터 1907년 사이에 작곡됐고, 5번은 1930년에 작곡되었다. 마지막 6번째 작품은 미완성이었다가 안소니 페인에 의해 완성이 된다.
1902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음악으로 작곡된 1번은 당시 이 작품에 너무도 감탄한 '희망과 영광의 나라'라는 제목의 시를 가사로 붙이게 한다. 독립된 노래로 영국에서는 지금까지도 국가처럼 널리 불리고 있으며 2002년 영국 버킹엄 궁정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50주년 기념공연에서도 연주되었다. 대관식과 여왕 즉위 같은 궁정의 행사로 쓰일 정도니 그 인기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원래 이 곡 제목인 ‘화려하고 거창한 예식’이라는 뜻의 ‘Pomp and Circumstance’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 중 3막 3장의 대사에서 따왔다. 지금 영국 사람들에겐 이 곡이 제2의 국가로 여겨질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고등학교나 대학교 졸업할 때도 이 곡의 중간 부분인 트리오가 많이 흐르는데, 들으면 바로 흥얼거릴 멜로디다. 영국의 대표적인 클래식 페스티벌이자 BBC 국영방송이 주최하는 클래식 음악 축제 프롬스(Proms)에서도 마지막 곡으로 연주된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아리랑 같은 곡이다.
제목부터 딱 마음에 드는 위풍당당 행진곡
화려하고 거창한 예식은 위풍당당해야 어울리겠지? 원제인 화려하고 거창한 예식이라는 제목보다 ‘위풍당당’이라는 번역이 훨씬 와닿는다. 이 곡만 들으면 움츠렸던 어깨도 쭉쭉 펴고 가슴 확 펴고 고개 당당히 들고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작곡가 엘가도 처음부터 위풍당당하지 않았다. 가진 것도 없고, 학력도, 가문도 대단하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대영제국을 대표하는 작곡가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믿었던 힘과, 본연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믿었던 부인 엘리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엘가는 이 ‘위풍당당 행진곡’을 만든 업적으로 인생의 말년까지 국왕의 사랑을 받으며, ‘Sir 작위’가 붙는 영광을 안았다. 1904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이후 준 남작 작위도 수여받았다. 그리고 1905년부터 1908년까지는 버밍엄대학 최초의 음악교수로도 활동했다. 인생의 말년 복이 터진 것이다. 위풍당당 행진곡이 정말 그의 삶을 위풍당당하게 만들어줬다. 처음 작곡했던 1901년부터 1930년까지 30년 동안이나 이 음악을 만들었던 시기에 엘가는 점점 위풍당당해졌다. 우리도 이 음악을 들으면 누가 뭐래도 당당하게 멋져질 것 같지 않은가?
영화 킹스맨의 콜린 퍼스도 음악가 엘가도 모두 영국인이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게 한 두 사람이다.
추천 영상
9‘ Elgar - Pomp and Circumstance March No. 1 (Land of Hope and Glory) (Last Night of the Prom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