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불멸의 연인'과 베토벤 음악들
클래식을 몰라도 이름은 다 아는 음악가 베토벤! 한때 베토벤에게 강렬하게 끌려서 12월 17일인 그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사용하기도 했다. 끌리는 작곡가의 생일이나 탄생 연도를 비밀번호로 쓰는 건 어떤 식으로든 기억하고 싶은 팬심이다. 그는 일생을 부재로 인한 결핍의 삶을 살았다. 음악 신동이라 불리는 모차르트의 삶과 항상 비교됐던 베토벤은 모차르트에 비하면 부모의 사랑도, 타고난 재능도 모든 게 부족했다. 1770년 라인 강이 흐르는 독일 본에서 태어났지만 조상들은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이민자였다. 이민자의 삶이 그리 넉넉할 리는 없었기에 그에겐 부족으로 인한 결핍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음악가이긴 했지만 바흐 가족처럼 화목하지도, 모차르트 아버지처럼 능력 있는 부모도 아니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욕심과 무리한 교육으로 아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연약하고 힘없는 어머니마저 일찍 돌아가시자 그는 가정을 책임지는 소년 가장이 됐다. 그에게 가족은 힘이 아니라 짐이었다. 그러나 그런 결핍 속에서도 오히려 좌절하지 않고 모든 것을 승화시킨 그는 진정한 승리자다.
모차르트의 인생을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나 베토벤의 인생을 다룬 <불멸의 연인>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다. 청력상실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사랑에 진실했던 그의 러브스토리가 영화의 극적인 소재로 적격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위대한 악성에게서 부족한 인간의 모습이 느껴져서일지도 모른다.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은 순간에 베토벤은 더 가깝게 들린다. 그의 음악은 많은 이에게 잔잔한 위로를 건낸다. 영화 ‘불멸의 연인’이 개봉한 지 15년이 넘었다. 영화의 모든 것이 사실은 아니지만 적어도 베토벤의 인간적인 모습을 상상해보기엔 영화는 부족하지 않다. 영화 속에서 흐르는 명곡의 위대함은 더할 나위 없고!
불멸의 연인들과 나눈 사랑
영화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베토벤의 오랜 친구이자 비서인 안톤 쉰들러는 베토벤의 유언장에 쓰인 상속자를 찾아 나선다. 사람들은 베토벤의 유산이 하나뿐인 막내 동생 요한에게 남겨질 거라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불멸의 연인 앞으로 유산을 남겼다.
쉰들러는 친구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그녀를 찾아 나서지만, 그가 쥐고 있는 것은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에게 쓴 편지가 유일했다. 수취인 불명의 편지다. 베토벤은 일생을 거쳐 9번의 프러포즈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물론 기록이 되지 않은 사랑의 흔적들도 많았으리라. 아직도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유력한 후보인 몇 명의 여인들을 살펴보자면 빈에서 만난 브룬스비크 가문의 두 딸과 사촌 귀차르디니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부유한 상인의 아내인 안토니 브렌타노 부인이다.
1799년 베토벤은 헝가리 출신의 젊은 백작부인 테레제 브룬스비크와 조세피네 브룬스비크 자매를 만난다. 테레제는 조세피네보다 4살 위의 언니인데, 동생 조세피네가 나이 많은 남자와 일찍 결혼했지만 남편이 죽어 불행한 생활을 한 것에 반해 언니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언니와 동생에게 각각 다른 형태의 사랑을 품었던 베토벤이다. 언니인 테레제에겐 소울메이트로서 공감대를 느꼈다면, 조세피네에겐 불행했던 그녀의 결혼생활을 안쓰럽게 여긴 측은지심이었다. 조세피네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고 혼자 있던 시기엔 다시 그녀를 사랑하기도 한다. 그때 작곡된 곡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다.
두 자매는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면서 만남이 시작됐다. 더불어 발랄하고 예쁜 사촌인 줄리에타 귀차르디라는 여인도 등장한다. 베토벤은 그들에게 피아노 연주도 해주고 레슨도 하면서 사랑과 우정 사이를 오간다. 베토벤은 그들과 지내면서 빈과 헝가리에 있는 그녀들의 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들이 갖고 있는 물질적 풍요와 미모, 귀족적인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음악을 사랑하면서 존경의 눈빛을 보낸 그들을 거부할 수 없었다. 모두가 사랑하는 여인들이었다. 같은 자매를 사랑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되기도 하지만 뭐 사람의 마음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니까. 사랑이 죄는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영화 속 가장 슬픈 장면
영화 속 베토벤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눈물의 주체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슬픈 건 매 한가지지만, 더군다나 베토벤의 그것은 왠지 더 애처롭다.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피아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 베토벤의 모습이 매우 슬퍼 보였다. 실제로 그는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높은 소리보다도 진동의 폭이 큰 낮은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다. 그에게 음악은 소리가 아닌 진동으로 느끼는 거였다. 장치를 통해서만 세상을 들을 수 있었던 베토벤이 얼마나 가엾던지. 베토벤이 피아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느끼는 영화의 그 장면에서 피아노 소나타 월광이 고요히 흐른다. 세상을 향한 원망을 가득 담아, 때론 슬픈 체념에 휩싸인 채 그가 울었다. 1799년 작곡된 8번 소나타 ‘비창’과, 1801년 작곡된 14번 소나타 ‘월광’은 베토벤의 시그니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고 널리 알려진 곡으로 모두 베토벤의 서른 즈음에 작곡됐다.
왜, 꼭 베토벤이었을까? 신은 하필 작곡가인 그에게 그런 가혹한 형벌을 내린 걸까?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것도 버거운 이 소년에게 창작의 기쁨마저 빼앗아간 신의 저의는 무엇일까?
체념만이 유일한 피난처라니 마음이 아리다.
영화 속 베토벤의 마지막 가는 길엔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2악장이 흐른다. 동생의 아내인 요한나가 그를 용서하고 임종을 지키는 장면에 흐르는 곡이다. 원래 이 곡은 베토벤의 최고 후원자 겸 제자인 루돌프 대공을 위해 1809년 빈에서 완성한 작품으로, 작곡한 지 약 2년 반 뒤인 1811년 11월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성공리에 초연됐다. 나폴레옹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서 자신의 고마운 후원자에게 기운을 주고 싶었을까? 베토벤은 루돌프 대공에게 황제의 위치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를 생각하며 이런 웅장한 곡을 만들었을 것이다.
<황제>라는 제목은 웅장한 느낌을 주는 1악장 때문에 붙여졌다. 베토벤의 친한 친구인 독일계 영국 피아니스트 겸 출판업자 요한 크라머가 런던에서의 출판을 위해 넣은 것이다. 웅혼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1악장에선 강하고 힘 있는 멜로디가 펼쳐지지만 2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 겪는 좌절을 표현하면서 잔잔한 파도처럼 노래한다. 영화에서는 2악장이 흐른다. 이상을 받쳐주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천하의 베토벤도 마음이 불편했다. 믿었던 정치가(나폴레옹)에 대한 배신 그리고 자기에게 연금을 줬던 귀족들이 사라져서 다시 피폐해진 자신의 삶. 복잡다단한 감정이 이런 멋있는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이 멜로디는 오스트리아의 순례의 노래 멜로디를 사용했는데 그래서 더 숭고하고 애절하게 들린다. 전체 3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곡은 하나의 이야기를 3부로 나눠서 전개하는 방식이다. 전체 40분 정도 되는 곡으로, 1악장만 연주 시간이 20분이다.
베토벤에게 부재와 결핍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형질이었지만, 후천적인 노력으로 모든 걸 승화시켰다. 그랬기에 우린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는 거다. 그의 이런 드라마틱한 인생을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을 보며 다시 한번 베토벤의 음악에 귀 기울여 본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음악의 끈을 놓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부지런했던 베토벤. 부모에게서 받은 건 없었지만 그는 그 부재와 부정의 힘으로 세상과 싸워 이겼다. 불행을 최고의 장점으로 바꾸는 사람. 그의 삶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추천음반>
지휘자 줄리니와 함께 했던 1982년 음반.
완벽주의 성격으로 평상시 공개 연주를 많이 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리가 지휘자 줄리니와 함께 한 음반이다.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하는 철학가라고 불릴 만큼 독특하고 엄격한 음악적 안목을 지니고 있다. 그는 반드시 조율사와 자기 피아노를 가지고 다녔다. 미켈란젤리와 줄리니 두 명의 멋진 이탈리안이 함께 무대에 섰던 멋진 레코딩이다. 카를로 줄리니는 LA 필의 감독이었던 당시 정명훈을 부지휘자로 발탁하여 기회를 주고 길을 열어줬다.
피아노 아르투르 미켈란젤리, 1960년 바티칸 실황
3악장 36‘13 경에 들리는 천둥소리가 미켈란젤리의 웅장한 피날레를 예고하며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평을 듣고 있는 실황 음반으로 1960년 바티칸에서 열린 연주다.
<조성진 정명훈 황제 앨범>
황제 추천 음반에 나란히 줄리니와 정명훈을 소개해 본다. 이 앨범은 지휘자 정명훈과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던 2018년 롯데콘서트홀 실황 음반이다. 쇼팽 콩쿨의 우승자와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 정명훈이 나이를 넘어 음악을 하는 동반자로 함께 한 연주다. 베토벤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와 교향곡 5번 ‘운명’이 같이 실린 이 앨범은 5000장 한정 판매되어 더욱 귀한 가치를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