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아니스트조현영 Mar 27. 2022

‘위험한 사랑’의 시작 알리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영화 '색계'와 브람스 '간주곡 op.118-2'


가을의 정취에 젖어 할 일 못하고 흔들리는 나이는 이미 지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이 오면 감정의 동요가 적잖이 걱정이 된다. 그 동요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브람스다. 가을은 브람스의 계절이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식고 깊어가는 가을에 브람스는 안성맞춤인 음악이다. 로맨틱한 남자 브람스의 음악은 여러 매체에 소개되지만 역시 영화에 흐를 때 빛을 발한다. 영화 <색, 계>에 흘러 더 유명해진 브람스의 ‘피아노 모음곡 Op.118-2’ 이다. 처음부터 영화를 위해 만든 음악처럼 로맨틱하게 들린다. 

 

영화   

중국을 대표하는 이안 감독이 만든 영화 <색, 계>에서 나를 사로잡는 건 배우 양조위와 음악이다. 순수하고 내성적인 여주인공 왕치아즈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생의 많은 것들이 변했다. 전쟁과 함께 영국으로 떠나버린 아버지를 기다리며 그녀는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연극부 활동을 하며 무대의 묘한 매력에 빠져든다. 연극부의 대표인 남자 선배의 권유로 항일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고, 친일파의 우두머리인 남자 주인공 ‘이’를 암살하는 임무를 맡는다. 암살작전은 생각만큼 쉽게 이뤄지지 않았고 첫 번째 계획은 무산됐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연극부 선배는 더욱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왕치아즈에게 친일파 ‘이’를 암살할 것을 강요한다. 평범하게 살고 있던 그녀는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리고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죽여야 하는 ‘왕치아즈’와 죽어야 하는 ‘이’.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전쟁도 시대도 그 어떤 것도 막지는 못했다. 계(戒)를 지켜야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본능과 강한 사랑으로 색(色)을 탐한다. 몇몇 장면들은 자칫하면 그저 단순한 유혹적인 장면이 될 수 있었지만, 이안 감독은 이 격정적인 장면을 통해 두 주인공들이 겪는 심한 내적 심리상태의 변화를 세심하게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감독의 이런 예술적인 승화 능력이 영화의 백미라 생각한다. 결국 두 사람은 시대와 전쟁 때문에 파국을 맞는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죗값치곤 너무 가혹했다. 


차갑지만 뜨거운 사람 브람스

이 영화의 전반에 브람스의 모음곡 Op.118의 2번이 흐른다. 특히 둘이 식당에서 만나 의심스러웠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 흐르는 브람스는 심장을 멎게 만든다. 브람스는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절제를 하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대단한 작곡 실력이 있는 그였지만 습작은 습작으로 남겼을 뿐, 함부로 아무 곡에나 작품번호(Op)를 붙이지 않았다. 창작물은 고뇌와 인내의 산물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보일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라야 세상의 빛을 보게 했다. 베토벤(1770~1827, 독일)을 지극히 존경했고, 슈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진지한 청년 브람스는 많은 습작을 거친 뒤 다장조 피아노 소나타에 첫 작품번호를 증정한다.


베토벤이 평생을 심사숙고하여 32개의 피아노 소나타에 열정을 피력했다면, 브람스는 초기 청년기에 3개의 소나타로 응축해 발산시켰다. 앞 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에 작품번호 1(Op.1)과 2 (Op.2)를 붙였고 그의 마지막 소나타이자 세 번째 소나타 (Op.5)에 작품번호 5를 붙였다. 그 후로 브람스는 고전파를 대표했던 '피아노 소나타'라는 장르와는 거리를 두고 바이올린이나 첼로 그리고 다른 악기들의 실내악과 가곡에 몰두한다. 물론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등에도 관심은 보였지만 사색과 철학의 작곡자 브람스는 초기의 대곡 형식으로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고는 잠잠했다가 말년에 다시 피아노곡을 쓰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의 산속 온천 마을 바트 이슐 (Bad Ischl , ‘Bad’ 온천을 뜻하는 독일어)은 예로부터 예술가들이 특히 사랑하던 곳이었다. 많은 음악가들이 예술적 창작의 영감을 얻기 위해이곳을 자주 찾았다. 마지막 피아노 곡들도 이곳에서 작곡된다. 작품번호 116,117,118,119 네 개의 모음곡들은 브람스의 말년을 대표하는 피아노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각각 7개, 3개, 6개, 4개 등으로 구성된 이 모음곡들은 1892년부터 1893년까지 단 2년에 걸쳐 작곡된다. 어쩌면 브람스는 단 하나의 가치에 유난히 집중하는 성향이었을까? 2년 동안 그 보석 같은 곡들을 끊임없이 쏟아내려면 얼마나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모아야 했을까? 브람스가 생각이 많았던 건 모두 이유가 있었나 보다.


  네 개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바로 작품번호 118의 두 번째 곡이다. 브람스는 평생을 한 여자에 집중했다. 스승의 아내였던 클라라! 살면서 클라라만 사랑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 그의 사랑이 그녀에게 치우진 것은 사실이다. 브람스는 Op.118과 Op.119의 작품들을 완성한 순서대로 클라라에게 보낸다. 브람스가 누구인가! 어느 한 음도 허투루 쓰지 않는, 생각의 생각을 더하는 철학가가 아닌가? 그리고 사실 이 곡이야말로 클라라를 향한 연가였으니 주인공인 그녀의 느낌을 꼭 듣고 싶었으리라. 나이 60이 되었어도 심장은 뜨거웠던 그였다. 


브람스는 이 곡의 머리말에 '안단테 테네라멘테 (Andante teneramente)'라는 지시어를 적었다. '테네라멘테'란 ‘상냥하게, 애정을 가지고' 란 뜻의 음악 용어다. 그의 사랑이 평생을 걸쳐 천천히 상냥하게 애정을 가지고 그녀에게로 향했던 것처럼 연주해 달라는 당부였을 것이다. 이곡은 피아노 곡이지만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불러도 될 만큼 선율이 아름답다. 가사가 없이도 아름다운 선율이 그려내는 뉘앙스는 분명 '사랑'이다. 겉으로 들리는 멜로디는 매우 단순하지만, 내성이 복잡하게 꼬여있는 대위법적 기술이 담겨있는 곡이다. 바흐를 좋아하고 베토벤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그의 음악 안에서도 숨은 그림처럼 위대한 거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다. 쉽게 드러내지 않고 살며시 주의해서 조심히 듣기를 바랐던 그의 마음이 3도 화음을 통해 전해진다. 


오른손 윗 성부의 첫 주제는 반복되는 선율 부분에서는 왼손 엄지로 옮겨가며 다른 성부에서 나타난다. 때론 오른손과 왼손을 연결하여 멜로디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든 주제의 흐름은 변치 않는다. 주제가 나오는 도중 흐르는 묵직한 코드는 찬송가의 한 구절처럼 덤덤하게 읊조리는 브람스의 고백을 듣는 것 같다. 심장에서 요동치는 본능적 사랑의 느낌과 뇌에서 지시하는 이성적 억제가 교차되는 느낌이다.


이 곡을 듣다 보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주제로 다뤘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한국 드라마 '밀회'가 생각난다. 드라마 ‘밀회’에서는 어린 남자 제자와 연상의 여자 교수와의 로맨스를 다룬다. 마치 브람스와 클라라인 것처럼. 등장하는 모든 남녀 주인공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괴로워한다. 


미완(未完)일 때 더 아름다운 것이 사랑일까? 정말 사랑을 하면 결혼은 하지 않고 브람스처럼 평생을 곁에서 바라보기만 해야 할까? 아무튼 브람스의 음악은 가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장 잘 어울리는 클래식이다. 프랑수아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역시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주인공들이 나온다. 거기서도 왜 하필 브람스여야 했을까? 냉정한 이성의 작곡가이면서 뜨거운 감성의 작곡가 브람스. 그에게도 사랑은 머리로 정리 되지 않았다. 계(戒)를 버리고 색(色)을 택했던 영화 속 주인공들의 내면이 브람스에게도 그대로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역시 사랑은 어렵다.


<추천음반>    

https://youtu.be/-s4aZEeHlBA

Brahms: Intermezzo In A Major, Op.118, No.2

피아노 백건우

1946년 서울 출생의 백건우의 브람스는 특별하다. 올해로 76살을 맞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브람스 음악은 정말 따라하고 싶지만 흉내 낼 수 없는 피안의 연주다. 그가 연주 하는 브람스는 진짜 브람스라는 생각이 든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공허한 눈빛과 브람스의 강렬한 눈빛은 사뭇 대조적이지만 음악에서는 합일을 이룬다.     


https://youtu.be/1y4Iz9Y47Xo

Six Piano Pieces, Op. 118: Intermezzo in A Major, Op. 118, No. 2 · Murray Perahia · Johannes 

피아노 머레이 페라이어


한국의 백건우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미국 출신 연주가 머레이 페라이어. 그 역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비슷한 연배로 1947년 생이다. 내면의 깊이 있는 해석과 담백한 낭만성으로 고전과 초기 낭만 음악에 특별함을 더하는 연주자다. 정면을 응시하기보다는 저기 어딘가를 향하는 그의 눈빛에서 수줍음을 타는 듯한 브람스가 보인다. 가을에 듣는 페라이어와 백건우의 브람스 음반은 특별한 가을 호사다.






이전 02화 애절한 선율 타고 흐르는 남자들의 사랑 그리고 이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