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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니스트조현영 Mar 27. 2022

서로에게 없는 것만 찾으려 했어...

영화 ‘페인티드 베일 ’과 ‘그노시엔느’


영화 '페인티드 베일'


동양적 산수가 펼쳐진 안개가 자욱하게 낀 강 위. 두 남녀는 서로 어깨를 마주하고 앉아 사랑을 속삭이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자는 수줍은 듯 양산 아래서 고개를 밑으로 향하지만 옆에 있는 남자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랑을 느낀다. 둘이서 배를 타고 유유히 강 을 지나가는 장면이 왠지 시원한 결말은 아닐 듯한데.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제목부터 느껴진다. <페인티드 베일>이라니, 가려진 베일에는 어떤 것이 숨어 있을까?


가려진 모든 진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핵심은 사랑에 대한 재정의다. 1925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는 미모와 재능을 갖춘 영국 사교계의 스타 키티(나오미 와츠)와 파티에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월터(에드워드 노튼)가 주인공이다. 월터는 숫기 없고 차가운 냉혈한이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 앞에선 누구보다도 적극적이다. 월터는 키티에게 청혼을 하고,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부모의 그늘 아래 있던 키티는 덥석 그 청혼을 받아들인다. 


월터는 의사이자 세균학자인데 직업상 중국 상해로 거주지를 옮긴다. 영국 사교계에 익숙한 키티에게 문화도, 날씨도, 모든 것이 낯선 중국은 불편하고 힘든 곳이다. 이성적이고 자기 할 일 잘하는 월터와 사람과 파티를 좋아하며 자신의 미모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키티는 점점 더 멀어진다. 부부간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마음이 들면 마음은 극도로 허전해지고 외롭다. 외로웠던 키티는 파티에서 적극적이고 호탕한 성격의 외교관 찰리와 사랑에 빠지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만다. 


키티의 불륜을 알아차린 월터는 부인의 행동에 복수를 하기 위해 콜레라가 창궐한 산골 오지 마을로 자원하고, 자신과 이혼을 하든지 산골로 같이 들어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며 단호하게 말한다. 키티는 자신과 불륜에 빠진 외교관 찰리에게 달려가 부인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자고 하지만 그는 전혀 부인과 이혼할 생각이 없다. 키티는 사랑이었지만 찰리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벌을 받는다며 감옥에 갇힌 기분으로 하루하루 불행한 나날을 보내다가, 수도원에서 산골 주민들에게 봉사를 시작한다. 처음엔 전혀 마음을 열지 않던 주민들이 키티에게 점점 마음을 열었고, 월터 역시 전염병으로 죽어나가던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그들에게 진심을 얻는다. 둘은 사랑과 봉사의 힘을 느끼며 다시 관계가 좋아졌지만, 월터는 전염병에 걸리고 만다. 키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산골로 들어왔지만 그녀가 아닌 그가 병에 걸려 죽게 됐고, 마침내 그녀를 용서하며 사랑에 대한 재정의를 내린다.


월터는 키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린 너무 오랫동안 서로에게 없는 것만 찾으려 했어...”


이 영화는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등 제목만으로도 고전의 반열에 드는 작품을 쓴 서머셋 모옴의 소설 <페인티드 베일>이 원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생의 베일>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발간됐다. 모옴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다시 영국에 와서는 의대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의사의 꿈을 접고 작가로 전향한다. 철학에, 의학에, 문학에 대체 모옴이 못하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모옴이 정신가 의사가 됐다면 상담을 굉장히 잘했을 것이다. 인간의 내면세계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허영과 부조리로 가득 찬 불완전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들여다 보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니 말이다. 


페인티드 맨페인티드 뮤직

  

영화에 있어 음악의 역할은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이 영화야말로 이 곡이 아니었던들 그 느낌이 충분히 살지 못했으리라. <페인티드 베일>에는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가 흐르는데, 키티가 처음 월터를 만난 장면과 중국에서 그녀가 힘든 시기에 아이들에게 연주하는 장면에 등장한다. 물론 다른 곡도 좋지만 클래식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음악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 강 위에 떠있는 배를 타고 중심 잡기를 하는 그들의 관계는 모호하면서도 의뭉스럽다. 


작곡가 사티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진 모호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그는 페인티드 맨이다. 가려진 남자. 침묵의 남자. 베일에 싸인 그의 인생과 음악을 살짝 엿보자. 그는 59년의 생애 동안 기괴한 행동과 낯설은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다. 작곡뿐만 아니라 글 쓰는 재주도 뛰어나서 다다이즘 전문지나 대중 잡지에도 기고를 했다. 다다이즘이란 ‘다다’라는 단어에서 뜻을 추적해 볼 수 있는데, 다다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말머리가 달린 장난감 인형을 일컫는다. 인간 본성에 충실하며 자유롭게 표현하는 초현실주의를 의미한다.


사티는 20세기 파리 아방가르드 작곡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인물로 꼽히며, 미니멀리즘이나 부조리극 등 20세기 예술운동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에릭 사티는 1866년 프랑스 북부 옹플뢰르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아버지의 일 때문에 파리로 이사를 간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돌아가시게 되자 다시 고향으로 와서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음악 수업을 받는다. 사티가 12살에 조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다시 파리로 가서 재혼한 아버지와 함께 산다. 어릴 때 엄마의 죽음을 접하고, 양육자가 자주 바뀌면서 사는 곳도 바뀌니 아이의 마음은 늘 불안했을 것이다. 13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지만 교사들에게 재능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후 학교를 그만뒀다가 2년 뒤 재입학했는데도 교사들의 평은 같았다. 그러고는 군대 입영장을 받았지만 군대에 들어가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고 끝내 탈영을 한다.


21살 때부터 고향을 떠나 몽마르트 언덕에서 독립해 살던 사티는 초기부터 그의 스타일로 작곡된 작품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여인 수잔 발라동을 만난다. 수잔은 1893년 27살 사티의 마음에 불을 지핀 모델이자 화가다. 사티에게 수잔은 사랑이었지만 수잔에게 사티는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사티의 청혼을 거절한 수잔은 그를 떠났고 사티는 그 이후로 어느 여인과도 사랑을 하지 않고 파리 교외의 3층 외딴집에서 27년 동안 음악만 작곡하고 지낸다. 평생 가난과 고독의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지닌 사티는 왠지 화가 고흐를 닮았다.


영화에서는 사티의 <6개의 그노시엔느(6 Gnossiennes)> 중에서 첫곡인 ‘Lent’(느리게)가 흐르는데, 6곡 중 1번이 가장 유명하다. ‘그노시엔느’는 그리스 남쪽의 섬 크레타, 혹은 ‘크레타 사람의 춤’을 말한다. 처음 출판했을 때는 <3개의 그노시엔느>였지만 사티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전기 작가였던 로베르 카비(Robert Caby, 1905~1992)가 3곡을 더 출판해 지금은 <6개의 그노시엔느>로 전해진다. 1889년부터 1897년까지 대략 10년에 걸쳐 작곡됐고, 차분하고 느리며 몽환적인 느낌은 그의 전작 <짐노페디>와 비슷하다. 멍 때리고 싶을 때 들으면 좋을 음악이다. 곡 전체 나타냄말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 다행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군’ 같은 말이 쓰여 있다. 음악과 상관없는 아무말이 등장한다.


사티의 생애가 더 궁금하다면 일본 작가 아라이 만이 쓴 <에펠 탑의 검은 고양이>를 추천한다. 사티의 생애를 소설처럼 다룬 내용으로 상당히 재미있다. ‘검은 고양이’는 사티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벌었던 카바레의 이름이다.

"나는 너무 늙은 세상에 너무 젊어서 왔다.”

라는 명언을 남긴 에릭 사티.


페인티드 맨이었던 사티의 <그노시엔느>를 들으며 영화 속으로 빠져보시길.


<추천음반>

영화의 OST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했는데, 중국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피아노 곡은 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랑랑이 연주했고 프라하 심포니가 함께 했다.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음악으로 엄선된 음반에는 사티의 <그노시엔느>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의 음악을 작곡한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리버 왈츠>도 수록되어 있다. 모든 음악이 아주 특별하다.

랑랑 연주- 그노시엔느 1번

https://youtu.be/t27rzTkFKmU


알리스 사라 오트 연주-그노시엔느 1번

https://youtu.be/jcS77876Ps4


일본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1988년 생의 알리스 사라 오트. 탁월한 음악적 해석과 맨발로 연주하는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인데, 아쉽게도 2019년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많은 음악 팬들이 그녀를 걱정하는 가운데, 그녀는 계속 연주하며 이겨낼 거라고 희망을 전한다. 그녀의 앨범 < Nightfall>에서 들려주는 그녀의 음색을 꼭 들어보시길. 앨범 자켓에 있는 그녀의 슬픈 눈빛이 움악을 듣는 내내 뇌리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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