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할아버지가 주실 양말 속 선물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남편 보너스도 술 마실 모임도 아니다. 굳이 꼭 필요하냐 묻는다면 즉답은 피하겠으나 이 맘 때가 되면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것. 어떤 모습일지 어느 회사일지 궁금하고도 설렌다.
쇼핑에 중독이 된 적도 있을 만큼 물건 사길 좋아한다. 그러니 당연 좋아하는 공간은 뻔하다. 물건을 파는 곳. 그것이 옷이 되었든(백화점) 두부든(마트) 커피가 되었든(새로 문을 연 커피숍) 모나미 153 한정 볼펜(문구점)이든 사포가(철물점)되었든 종목은 상관도 없다. 무엇이든 새로운 물건과의 만남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구점을 참 좋아한다. 남편과 연애시절. 누구는 설악산 꽃구경, 여수 밤바다 구경, 에버랜드 놀이 공원... 또 뭐 하지? 뭐 그런 구경이나 데이트를 할 때 나는 문구점으로 손을 끌었다. 책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싼 돈도 필요 없이 충동구매에도 너그러울 수 있고 기분 내키면 꼭 사달라며 선물을 강요할 수도 있는 공간이라서다. 책방은 또 어떤가. 이미 사놓은 책이 먼지에 쌓여가도 새 책이 주는 냄새는 샤넬 NO.5와 비교조차 불가다. 내가 샤넬 향수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새 옷이 주는 날염, 석유냄새와 또 오묘하게 달라 설렘 유발 결이 살짝 다르다. 건강에 좋은 것도, 머리가 아플 때 피곤할 때하며 상황별 필요한 아로마 향도 아니지만 그 물건이 갖고 있는 고유한 향이 주는 만족감과 포만감은 즉각적인 행복감을 선사한다. 냄새만으로도 이미 입꼬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반사다. 결혼 후 남편은 지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문구점에 도대체 왜 가는지 신기하더라는 말을 자주 했다. 볼펜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무언가 사려고 갔다면 목적을 이룬 후 나올 거라 생각했지만 매번 예상은 어긋나고 하릴없이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자를 모르던 남편은 마트를 빙글빙글 돌며 "살 거 있냐"는 물음에도 "아니 그냥 보는 거야!" 하는 마누라 말에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문구점 갔을 때 진작 알아챘으면 마트 지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는데.. 뭐 불행 중 다행인 건 우리 동네 하나뿐인 탑마트는 너무 공간이 협소해 20분 이상을 있을 수 없으니 여기 남편들은 복도 많다.
막 남편이 퇴근을 했다. 11시가 다 되어 야근을 마친 가장이 집에 온 것이다. 어서 오라며 인사를 하는데 손에 들린 물건이 보인다. 남편 손에 무언가 들려있다면 소비자는 둘. 본인 혹은 나머지 가족 구성원 여자들. 본인 것은 비닐 속에 들었을 때가 많다. 편의점 비닐 속에 넣어진 맥주와 마른안주. 그게 아니라면 물건의 주인은 나일 가능성이 크다. 오늘은 비닐 속에 든 것이 아니다. 네모난 것이 맨손에 들려있다. 참고로 남편은 책을 갖고 다니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손에 든 두께감, 색감, 신상의 느낌. 1초 만에 감이 온다. 다이어리다. 남편 얼굴보다 손에 들린 물건을 반갑게 쳐다본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든다. 작년은 흰색. 한지 가죽으로 된 이쁜 다이어리였는데 올해는 뭔가 세련미가 폴폴 풍기는 검은색에 가까운 챠콜색 태블릿만 한 놈이다. 내지도 최소한의 선긋기로 여백의 미가 있다. 보지도 않는 세계전도니 전국 지하철 노선도도 없다. 긴급전화번호 안내도 없네. 한 해동안 한 번도 보지 않고 있다가 연말 그저 종이류로 분류되어 버려지는 수많은 정보가 없다니. 올해는 미안할 필요도 없겠다. 쓸 공간만 있는 다이어리. 멋지다. 벌써 반했다. 얼마나 까맣게 채울지 어디까지 데리고 다닐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1년간 나와 가장 좋은 동료가 될 다이어리를 한 해가 시작되기 전에 만나서 좋다. 올해 동료와 업무를 넘겨받을 다이어리가 서로 여유롭게 인사도 할 시간이 주어져 더 좋다. 1월이 다 가서 시작하는 다이어리는 이상하게 김이 빠져버린다. 하지만 미리 준비할 수 있는 다이어리는 시험준비가 다 된 학생의 마음가짐처럼 기다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