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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Feb 23. 2024

시작

글쓰기 주제가 시작이라서....

일 벌이길 좋아한다.



일을 벌이는 걸 즐긴다기보다는 즉흥적이라는 게 맞을 거다. 기분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반가우면 "우리 여행 가자"며 바로 예약이며 날짜를 해치워버린다. 물론 말 한마디 던지는 건 내가 한 일이지만 나머지는 아니다. '가자'는 말을 던져놓으면 누군가가 너무도 성실히 날을 조율하고 좋은 곳으로 예약까지 한다. (여행이 내가 원한 일이긴 한 걸까?)

부동산 중개사를 따는 게 붐일 때는 내 역량이나 뒷일은 생각도 없이 학원을 끊었다. 결국 돈만 잔뜩 바치고 친구만 사귀었다. (중개사를 따는 게 정말 원한 것이긴 한 걸까?)


나름대로 정해놓은 계획이 있는 날. 오늘은 진짜 빨리 헤어져야지 하는 결심을 하고 나온 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웃고 떠들며 즐겁다 보니 또 헤어지기에 싫다. 2차 3차 가자며 떼를 쓰고 있는 '이 장면 눈에 익은데' 싶은 옛 회상 신과 옷깃을 잡고 있는 지금의 '나'가 겹치는 현장이 연출된다. 거절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간다는 말을 못 하는 우유부단함까지 참기름처럼 쳐져서 그런 거니 충동적인 성격이 더욱 풍성한 엉뚱함으로 비벼져 돌아오는 것일 테다. 사람 잘 안 변하는 건 맞나 보다.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분들과 마지막 수업 날. 좋아하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선지 그날따라 기분도 좋고 '우리 정녕 이대로'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쉬웠다. '언제 다시 만나나?'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보지 못할 가능성이 99%인 상황인데. 나중은 모르겠더라도 어쨌든 지금은 헤어지기에 싫다.


"우리 모임 하나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일까요? 같이 글도 쓰고 말이에요"

"저는 좋아요"

"어, 그럼, 저도요"

"연락하세요"


그렇게 일을 또 저질렀다.

어디서 언제 어떤 주제로 글을 쓸 건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덜컥 '기분'임께 잘 보이려 일을 벌였다. 글 쓰는 인간으로 만난 인연도, 글 쓰며 살고 싶은 기분도 남아 있는 상황에서 벌인 일. 나머지는 알아서 척척 해주는 친구도 없다. 뒤는 모르겠고 못 먹어도 일단 '고'하던 성격이 저지른 일이지만 뒷배가(뒷일 해주는 친구) 없는 지금, 무책임할 수도 없다. 일단 벌인 일은 마무리해야 한다. 나에게 사회적 지위와 명예는 없지만 나이는 있다. 우스운 인간만은 참아야 한다. 웃기는, 재미있는 인간이 아니라 우스운 꼴의 인간만은 말이다.


두 번째 수업이다. 아니 수업을 누가 하나. 수업이 아니라 수업하는 교실을 빌려 하는 두 번째 글쓰기 모임이다. 지난번에는 모임의 성격에 관해 얘기하고 시간과 요일을 조율하고 소소한 리칙(동아 규)도 모아봤다. 내일이 글쓰기 첫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첫 만남. 과연 쓸 수 있을까? 합평이 될까?


무엇이든 시작이 있었을 테다. 첫술에 <맛있는 녀석들> 속 '한 입만'처럼 먹을 수 있다면 배도 부를 수 있을 테지만. 거기까진 생각하지 말자. 그들도 처음부터 돼지(본인들의 말을 빌려)였던 건 아니니 시작은 미미했을 테다. 부단한 연습과 열정으로 이루어 낸 식욕일 거라는 사실. 그들의 성공이 갑자기 부러워진다.

네이버 한입만 이미지 퍼 옴

신경숙 작가가 말했다.


어떤 작가든 이 모든 관점에 비추어서 항상 잘 쓰기란 힘든 일이다. 항상이 아니라 바로 전에 발표한 작품보다 더 잘 쓰는 일도 어렵고 작가 연륜이 길다고 해서 작품도 더 나아지란 법이 없다.

(....)

글을 오래 썼다고 계속 잘 쓰게 되지도 않으니,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


요가 다녀왔습니다 중에서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만들어 낸 작가의 고백이 초보 글린이를 오열하게 한다. (아니 작가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작가로 태어난 것만 같은 작가마저 매번 처음부터 시작하고 쓸수록 더 잘 쓰게 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나는? 아니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글을 쓰자고 쉽게 말을 뱉다니....


스탑. 거기까지 가지 말자. 목적이 있지만 목적이 없다. 우리는 글을 쓸 거다. 읽어주는 이가 있지만 없는. 합평에서 내가 쓴 글을 읽을 때 그걸 들어줄 독자만 있을 예정인 글쓰기를 할 거다. 가볍게 시작하자. 작가, 독자, 책 이런 생각 없이. 그저 가볍게 취미 하나 늘었다. 뜨개질 같은 취미 하나 더 생겼다. '수세미가 하나 더 생겨 좋네' 하듯 가벼운 취미. 수세미는 3개만 넘어가도 친구네 사돈의 팔촌까지 줄 사람을 고민해야 하지만. A4지 한 장 집에 더 굴러다닌다고 별달라질 살림도 아니잖은가. 앞머리 자를 때 받침으로도 쓰고, 손톱을 깍을 때도 쓸모 있고. 글쓰기는 그렇게 가볍다. 쓰는 작업의 무게와 대조되게 쓴 결과는 가볍다. 무게가 없다.


가볍게 오늘도 취미를 시작해 볼란다.


(내일 글 동아리(토요 글방) 숙제로 쓴 글입니다.)

대문사진도 네이버 '한입만'으로 검색한 사진을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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