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재택 백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사임당 Apr 13. 2024

백수 가족 일기 8

신탁에 걸린 삶

집에 학생이 세 명이다.



물론 평생 배움에 소홀하면 안 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함에 따라 누구라도 학생이라 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나….그렇다. 4명이 전부인 가족(거북과 장수풍뎅이 애벌레는 왜 빼?) 중 세 명이 정식으로 학생이다. 큰딸은 중학생, 작은딸은 초등학생, 그리고 대학생 중인 나까지. 작은 여성들의 학교에는 딱히 돈이 들지 않지만(우윳값, 방과 후 값, 소풍 값-같은 마을에 있는 다른 초교는 야외 실습도 우윳값도 안 받는데 이 학교는 든다. 예산 문제겠지. 뭐)나는 대학생이랍시고 한 학기에 40만 원 정도의 돈은 든다. 뭐 대신 작은 여성들은 사교육비가 엄청나게 들고 나는 전혀 안 들긴 하지만 말이다. 하여튼 돈을 먹기만 하는 신분들이다.

계획한 그림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가장이 백수가 된 집에 학생만 있다. 지난달부터 될 계획이었지만 그리하여 지난달부터 대학에 들어간 나와 백수인 남편. 집도 차도, 애까지 있는 다 가진 남자 백수와 여대생(여성인 대학생)으로 일탈을 즐기면 좋았겠지만, 인생 꽤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이다 보니 그리되었다. 남편은 이번 달부터 예정한 백수가 된 거다.


오늘 토요일. 애가 둘인 여대생은 수업이 있었다. 온라인 수업, 줌 수업(같은 말 아님?ㅋㅋ) 노노. 오프라인 찾아가는 수업이다. 오후 4시 수업. 어제 마지막 과제를 내고 오늘 혹시나 쪽지 시험(초등학생이냐?!)이라도 갑자기 친다고 할까 봐 또 새벽까지 공부하고(라고 쓰고 놀다) 잤다. 늦잠으로 큰딸 보충수업도 딱딱 못 보내고 오전 내내 해롱거리며 잠을 보충받으려 어슬렁거리다 정오를 넘긴 시간. 둘째에게 깨워달라는 특명을 남긴 채 쪽잠이 들었다. 맛있게 자고 있는데 깨우지도 않고 남편이 묻는다.


안가나?

4신데 2시간 전에 가면 안 되겠나!?

보니까 54분 걸린다고 나오는데? 내가 아는 동넨데 여기 막혀!

그래? 그래도 1시간 반이면 가지 않을까?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 그래도 일찍 움직이는 게 맞겠지? 알았어.


눈 앞에 두고도 길을 못 찾는 심각한 '길치'라 전날이라도 출발해야만 할거다. 안 잔 척 일어난다. 뒤집힌 머리를 드라이하느니 한 번 더 감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다. 말린 후 5분만에 여대생(사회 통념상 20대 여자 대학생 아님 주의) 미모를 완성한다. 나가기 전에 거울을 쓱 보니 괜찮다. 뒤처지지 않는 미모겠다. 50대 60대 70대 80대까지 있는 학우 중에 너무 어려서 맨얼굴로 다녀도 이쁠 나이란 소리 듣겠다. 아 젊음이 이래서 좋다니까. 잠이 덜 깼는지 쉰 소리를 혼잣말 해대며 출발이다.


1시간 30분 걸렸다. 30분 여유롭게 도착했다. 이렇게 빠르게  올 줄 몰랐네.

동영상으로 보던 분을 직접 보니 연예인 보는 기분이다. 신기하네. 그런데, 아…. 수업 좋다. '오이디푸스왕' 수업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을 거스르기 위해 평생을 분투한 남자 이야기. 결국 신탁은 한치 다름도 없이 이루어지지만 거기서 끝이 났다면 그는 '나'일 테다. 운 좋아 왕이 된 남자일 뿐. 범인, 그저 필부였을 테다. 신탁으로 산산이 부서진 삶을 뒤로 하고 죽음이 아니라 신탁에 메이지 않는 삶을 택한다. 신탁 그 이상을 자신의 의지로 만든다. 신탁을 풀어보려 문제를 해결하려 모든 것을 찾으며 세상을 눈으로 좇고 보았으나 신탁으로 끝이 나 버린 과거를 본 눈을 버린다. 목메 죽은 어머니이자 아내의 유품으로 눈을 찔러 마음의 눈으로 살기 위해 홀로 떠난다. 선택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신이 되는 경지에 오르게 되는 거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친아버지에게 목숨을 받아 누구도 아닌 자에게 길러진 자. 모순과 역설 그리고 모든 공식이 깨어지고 세대마저 파괴되는 이야기였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 남은 인생 이곳에 모여 매일 이 이야기를 해도 다 하지 못할 만큼 숨은 뜻도 많고 할 얘기도 많은 이야기였다. 흥미진진했고 생각거리도 많았다. 게다가 과제는 적었다.


마치고 저녁을 먹자고 한다. 서둘러 나온다. 나는 해가 지면 집을 찾을 수 없는 신탁에 걸린 여자. 늦으면 끝이다. 해가 지면 집이 가까워져도 집으로 갈 수 없다. 점점 집이 가까워져야 하지만 해가 지는 만큼 집은 멀어지는 아이러니다. 다행히 해가 조금 걸쳐있다. 밟는다. 해 앞에 내 운전은 하늘마음을 기대할 수 없다. 신탁에 걸리지 않으려 버둥거릴수록 신탁은 자신을 옭아매는 법. 신탁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든 신탁을 기억하며 조심하는 삶. 적당히는 없다. 인생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렇게 오늘도 신탁 핑계를 대고 밥 사 먹을 돈 아꼈다. 알뜰하게 보낸 백수의 하루 일기 끝.


무지개달 열사흘 엿날(04월13일 토요일)


<오늘의 토박이말>

*하늘마음*

하늘처럼 맑고 밝고 넓고 고요한 마음



대문사진은 다이어리에 그려본 어반스케치. 수업 시간에 그린 거 아님 억울함.



매거진의 이전글 소고기가 좋아? (백수 일기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