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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May 10. 2024

미운 오리 새끼

그냥 오리였나

블로그를 하고 있다. 20대부터 했으니 20년 넘게 유지 중이다.




그것과는 무관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갑자기 찾아온 육아는 무력함과 종잡을 수 없음을 보장했다. 단조로우면서도 쉽지 않았고 누구도 막지 않았지만 자유롭지 못했다. 처음 태어난 아이가 기관에 들어가고 이제 숨 좀 돌리나 싶을 때 둘째가 찾아왔고 그렇게 도돌이표처럼 5년 만에 신생아를 또 키우기 시작했다.

강박처럼 좋은 것 최선의 것만 고집하다 보니 육아는 묵언 수행, 좌선 수행처럼 힘이 드는 것이었다. 제왕절개를 거부하고 모유 수유인지 눈물 수유인지를 15개월씩 하며 빵도 만들어 먹이고 과자는 먹이지 않았으며 뽀로로 보육 신에게 도움도 구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탭으로 스마트 폰으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는 (남들에게도 나에게마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옷도 만들어 입히고 책 육아 -책 읽어주는 시간은 오히려 편했다- 만 했다. 36개월은 엄마가 데리고 있는 게 최선이라는 말에 5살에나 기관에 보내며 집착했다. 너무나도 내 멋대로 산 인생을 반성이라도 하듯 모든 것을 책에 있는 대로 완벽하게 하려 했다. 세상에 없는 육아를 하고 싶었다. 차은우로 살래 30년 돌려줄 테니 젊은이로 돌아가 육아하겠느냐 묻는다면 주먹으로 한 대. 에헴. (강박, 완벽주의로 해 낸 육아는 우울증만 남겼었습니다. 육아는 내려놓기 같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육아도 시간이 데려간 곳이 있었다. 돌아서면 집에 오는 2시에 마치는 유치원일망정 내 시간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다. 시간 많고 체력 많을 어릴 때도 시간을 허투루 보냈으면서 그게 싫어졌다. 냇물에 종이배 띄우듯 의미 없는 행동으로 보낸 시간이 생각도 나지 않는지 갑자기 하루하루가 시간 시간이 소중해졌다. 십여 년을 하나만 판 (내 새끼) 육아전문가가 되어있었지만 반갑지(내세울 수 없는 그런 것 말고) 않은 그런 것 말고 뭐라도 하고 싶었다. <맘충>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대 집에서 애만 봤다는 소리 말고, 집에서 논다는 말 대신 무슨 행동으로든 항거하고 싶었다. 육아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 하는 무슨 행동, 활동이든 하고 싶었다. 평소 메여있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고 제멋대로 살아온 인생. 십 년 동안 집에만 있었으면 할 만큼 했다 싶었다.


살아있음을 인정받고 싶었다. 한 사람을 오롯이 책임져야 하지만 참으로 무력하기만 한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홀로서기 된 성인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내 깊은 속 자리지 못한 어린아이를 호출하지 않아도 대화가 되는 대상을 향해서 말이다.

운동은 싫고 여행도 싫고 이것저것 생각은 해 보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돈이 들지 않으면서 움직임을 최소로 하려니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그렇게 조바심 내며 살던 어느 날 도서관 유리문에 붙은 공고를 보게 되었다.


-진주 시민 독서 감상문-


요지는 정해진 책을 읽고 몇 페이지 이상의 독후감을 언제까지 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진주 시장 '상'도 주고 문화상품권도 준단다. 책 읽고 글 몇 자 쓰면 돈을 받는다. 더 중요한 건 남들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상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 학교 다닐 때도 개근상 외에 받아본 적도 없는 그것을 준다는 말에 심봉사 그러하듯 눈이 떠졌다. 상! 나도 인정받았다는 상 한번 받아보자. 집에서 삼시세끼 차리는 셀프 밥 '상'말고 남들이 차려주는 '상'받아보자, 의욕이 일었다.


언니가 쓴 일기를 베끼며 방학 숙제를 하던 나였다. 독후감은 프롤로그로, 에필로그로 추측해 짜깁기하며 겨우 내던 나였던걸 잊었다. 세월 보내며 좋은 점은 나의 단점도 흉도 가끔 기억이 가물거린다는 거일 테다. 자신을 미화하게 된다는 데 있다. 독후감 쓰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이던가. 백일. 곰이 사람마저 될 정도의 기간임에도 내게는 너무도 빠르게 흘렀다. 마감은 단 며칠. 인터넷을 돌며 남들이 적어놓은 것 커닝해 가며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공부해 가며 겨우 내 생각이란 걸 덕지덕지 모을 수 있었다. 평소 얼마나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살았는지만 깨닫는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제출했다. 상보다 더 비싼 시간이었다 자위할 수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 내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돌아보는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내가 보는 것 입는 것 먹는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돌아보는 시간. 나를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을 주는 게 쓰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상보다 값졌다.


그렇게 상보다 소중한 걸 깨달은 '기회'를 얻고 새로운 세상에 눈이 떠졌다. 독후감 사냥꾼을 해야겠다. 상을 받지 않아도 문상을 받지 못해도 매년 해야겠다. 쓴다는 것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제출한 독후감은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아졌다. 죽으려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했던가(예시가 너무 거창) 상을 놓았기에 상이 온 건가? 의외의 결과로 2등 상까지 받게 되었다. 최우수상은 아니지만 2등이라니. 세상에... 글 잘 쓰고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세상에서 내 보잘것없는 글이 2등까지 하다니. 진주에 독후감 낸 사람이 많지는 않았는가 보다 생각하면서도 기뻤다. 너무 자랑스러워 현수막 걸뻔했다. 노사임 진주 독후감 대회 2등 진주시장 상 받음. 진주 시장 이창희 씨가 그 당시 바빴는지 사우나(집무 시간 공무용 차로 매일이다시피 사우나 가서 뉴스에 많이 나왔습니다) 가셔서 없었는지 공무원이 대신 줬지만 벌벌 떨면서 받았다. 세상을 행해 인정받은 것 같아 처음으로 자랑스러웠다. 나 자신이 하찮지 않게 느껴졌다. 겨우 요런 상 하나에 말이다.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자랑도 잘난 척도 참으며 글만 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책의 주인인 작가님이 댓글을 남겨 놓았다. 고재욱 작가님이 남긴 댓글에, 칭찬에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작가! 글을 써 책을 낸다는 것은 내게 위인이나 하는 일이었지 나 같은 범인이 할 행위는 아니었으니까.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말은 내 가슴에 남아 내 자존감을 다독여 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는 인간 같던 나 자신이 조금은 그럴듯해 보였으며 꽤 근사해질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쓴 독후감 하나로 나도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작은 희망 하나 품게 되었다.


작가님고재욱의 브런치스토리 (brunch.co.kr)의 칭찬 댓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작가님 덕분에 만 년 후 제가 책을 낼 수도 있겠다는 0.0017% 가능성을 가슴에 품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쓰는 인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라라크루 [금요문장: 금요일의 문장 공부] 2024.05.10.


[오늘의 문장]

659.

사랑하는 이여, 강하다고

날 칭찬해준 그 첫날 -

원하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해준 그 날 -

그 많던 날 중 – 그날 -

그날은 – 부채 모양 금장식으로

둘러싸인 보석처럼 – 빛났어요 -

어렴풋한 배경이던 – 하찮은 날이 -

이 세상에서 – 가장 중요한 날이 되었어요.

에밀리 디킨슨,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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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시를 읽고 떠오르는 느낌이나 연관되는 일을 글로 써보기로 해요.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올 추석을 며칠 앞 둔 어느 날, 앞 집 작은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명절마다 인사를 드리던 집안 어른이었다. 아흔을 훌쩍 넘기셨으니 기억도 오락가락하고 아들마저 병중이라 그랬을 거라 생각만 했다. 요양원으로 가신 것은 말이다. 작은집 나름의 결정이었겠지. 식사도 혼자 잘 하시고 연세에 비해 정정한 편이셨다. 하지만, 요양원 입소 후에는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으셨다. 이해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나 작은집 어머니도 혼자 농사에, 남편 병간호에 힘드셨으리라. 노모까지 돌보는 것, 게다가 치매도 있으신 어른을 모시는 것은 보통 의지력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속마음을 흘리듯 얘기하고는 했다. 왜 다시 집으로 오시지 못할까? 먼 곳도 아니었는데, 잠깐이라도...


이 책은 백 여분의 노인분의 노년과 죽음을 함께한 요양보호사의 7년간의 이야기이다.

“무의미하게 화려한 작품보다는 가장 저속하더라도 어떤 이야기를 전하거나 사실을 기록하는 작품이 더 낫다”고 한 사상가 존 러스킨의 말처럼 저자는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과하게 감동을 주려하지 않는다. 담담한 어조로 노인 한분 한분의 역사를 옮기려 했다.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무력한 듯 한 그들의 이야기가 무르게 부서질 줄 알았는데 감정을 건드린다. 그 분들의 삶이 자아온 시간처럼 사랑도, 교훈도, 후회도 50개의 이야기 속에 들어있다.


언니 말에 결혼 하고 10년을 주기로 부부사이에 고비가 온단다. 좀 우습게만 들렸던 얘기였었다. 하지만 10년을 넘기고 보니 부부 사이의 문제뿐만 아니라 결혼제도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호 불면 날아갈까, 부서질까, 그 양반은 내를 아껴줬구먼”. 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중매결혼 하던 시절 첫눈에 반한 남편이 1년을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를 설득한다. 3일만 살아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온다며 결혼한 할머니. 할머니는 삼일이 지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첫날부터 행복했다고 한다. 서로 존댓말을 하며 존중했고 할머니가 퇴근하는 길에 할아버지가 마중을 나왔으며, 사람 없음을 확인 하고는 어깨를 감싸 안고 집으로 가셨단다. 스윗 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어느 날 아기가 뇌수막염으로 아파 간호를 하던 중 할머니가 쓰러졌고 그러자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곁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는 한 달을 아기 간호를 하셨다는 부분에서는 드라마를 보듯 그만 눈물 한 방울과 감동이 밀려왔다. 전날 애가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했는데 기어이 경기까지 하자 눈앞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술이나 마시고 있는 남편에 대한 증오가 끓어올라 눈물 흘렸던 기억이 오버랩 되어서 인가. 할머니의 돌아가신 남편의 달달함에 오래도록 잔상이 남는다. 그렇게 ‘사랑 못’을 남겨 놓아 지금도 사랑의 호수에서 아름다운 유영을 하시는 할머니. 변명하자면 내 남편도 그렇게 0점짜리는 아니다. 구체적인 얘기는 아름다운 일화가 너무 많아서 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대못’을 박고 가셔서 지금까지 살고 계시다고 하는데 내 남편은 대못 박을 사람은 아니니 더 낫지 않나 싶다. 난 수영을 못하니까 말이다. 흠흠


한 할아버지가 있다. 할아버지는 치매를 앓고 있다. 그의 아침은 날짜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늘이 며칠인고? 6월26일입니다.” 그러면 그는 올 해도 6.25는 일어나지 않고 지나갔다며 안심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때 나이 18세. 단 2주의 훈련으로 전쟁에 참전한다. 150센티미터 남짓한 작고 마른 그지만 참전용사요 명사수였단다. 지팡이를 들어 사격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지팡이 끝이 아무래도 엉뚱하다. 엉터리라며 한 마디 하자 할아버지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온다. “다 같은 조선 사람끼리 총을 제대로 쏘면 죽을 텐데 어떻게 맞히나? 사람 없는 땅에다 쏘는 거지. 백발백중으로 땅에다가” 목숨이 미물보다 하찮게 여겨지는 전쟁터이지만 할아버지의 인류애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내가 죽을 수도 있으나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진 않겠다는 결심이다. 역사의 변곡점은 당신의 명사수 시절 나이의 젊은이들로 인해 변화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 당신의 교훈 가슴에 담아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 할머니가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맛있는 것 먹고, 멋진 구경도 다녀보고, 하고 싶은 것 죄다 하면서, 그렇게 한번 살아볼걸 그랬어. 앞만 보지 말고, 옆에도 보고 뒤에도 보고, 그렇게 살걸 그랬어.”

그럼에도 그녀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때처럼 치열하게 뒤도 옆도 없이 달려왔을 것이다. 그녀, 그들과 같이 온 힘을 다해 달려오신 분들 덕에 우리가 불평도 하며 게으름도 피우며 삶도 즐기려 노력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노인들의 후회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애정이자 배려이리라.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도 좋다는 선배의 조언.


일본에는 치매라는 말이 없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대신 ‘인지증’ 이라고 말하는 그 증상은 요양원으로 격리하여야 하는 병이 아니라 재활을 통해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증상이라는 인식으로 접근 한다고 한다.

‘치매 국가 책임제’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요양원 입소. 그리고, 그 곳에서의 죽음. 누군가는 배를 불리고 이윤을 남기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업이 된 것 같다. 입소자를 늘려 머릿수로 프리미엄을 매기어 되판다는 뉴스도 들어보았다. 현실적으로 보살피기 힘든 가정이 많다. 하지만, 가족의 마지막을 요양소에서 맞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손보고 고쳐나가야 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알지만 우리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기는 많은 일에 관심을 놓지 않아야 함을 안다. 내 할머니, 내 할아버지가 일상으로 돌아오시기를. 꽃같이 돌아오시기를.


독립도 민주화도, 참고 인내하며 받아들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 지난 일이라며, 남의 일이라며 좌시하며 묻어두면 세상은 나은 쪽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에 더하여 요양보호사의 열악한 처우에 변화가 생기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같이 해본다. 시간 많고 능력 없는 중년(대부분이 중년 여성이지만, 저자처럼 남성도 있기에 아주머니들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의 최후의 일이라고 치부하는 시선이 있는지도 모른다. 10여키로 아기도 몇 번씩 들고 내리면 고장이 나는데 어른을 하루에도 몇 번씩 침대에서 의자로 의자에서 변기로 옮기고 힘을 쓰다보면 온 몸의 관절이 쉬 고장 난다. 모 국회의원 아들은 산재로 50억을 받았다고 한다. (이명과 어지럼증이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럼에도 건강을 찾기위해 조기축구를 쉬지않고 하며 관리를 했다고 하니 상이라도 주고싶다)산재보상금을 받은 것은 다행이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보통의 고용 현장에서는 대부분 산재 신청도 못 해본다. 환자에게 물려 살을 잘라내고 꿰매는 수술을 해도 ‘당신이 잘 하지 못해서’라는 비난 섞인 얘기를 듣는다. 치료비는 물론 자비다. 당사자 분들께 지나치게 혹독하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라지 않을까. 하지만, 육체의 고됨과 고통보다는 사회의 편견에 상처가 컸음을 저자는 숨기려 하지 않는다. “커서 공부 안하면 저런 일 한다!”로 들켜버린 일의 천함과 귀함. 살 날 보다 산 날이 많은 노인께 배워보자. 너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는 편견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었는지를, 약한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가는지. 내 속의 편견을 인정하고 나 또한 마주해야 한다. 치매환자를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저자와 같은 요양보호사에게도. ‘당신이 선택한 일이니 감내하며 하라’가 아니라 감사한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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