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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May 17. 2024

아무 일도 없는 날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그런 날

낮잠 자기 전 틀어놓은 음악이 머리를 모아 놓았다. 전두엽이 쪼여 눈이 아픈 기분이다. 길 건너 2단지 아파트 202동에 누군가 이사를 들어오나 보다. 타카 건 박는 소리가 쉴 새 없다. 바람이 강하게 분다. 윗집 열려있던 작은 방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힌다. 차 열쇠도 없이 잠긴 문을 열어서일까 상가 김밥집 앞에 세워 둔 차에서는 경보음이 울리고 있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일어나 주섬주섬 밥을 푼다. 오후 2시 첫 끼다. 고춧가루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체질이라 아이들이나 좋아할 반찬을 꺼낸다. 돈가스 김 감자 반찬에 식은 밥을 밀어 넣는다. (아이들 아침을 주고 전기를 뽑아 놓았다) 빨리 먹어버리고 싶다. 밥을 푸다 보니 배는 고파졌지만, 맛도 없다. 식욕은 일지 않는다. 마지막 두 숟갈을 반찬도 없이 흰쌀밥만 단물 뽑듯 씹어 삼킨다.


아주 약하게, 표 나지 않게 살짝 밀어주면 자기 걸음인 줄 알고 걷는다. 이렇게 걷는 게 쉬었나 하며 자만하는 마음도 생긴다. 생각의 깊이가 얇다. 세게 밀면 발이 따라가지 못한다. "뭐야 왜 이래?" 바람을 탓하며 주저앉는다. 자신을 알지 못한 약한 인간은 두 번 다시 걸어보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 섬세하게 챙겨주고 조종해 주지 않는다면 조용히 실패자로 살기 좋은 성향이다. 그렇게 살아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어 어제 같은 하루들을 살았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면 청소 좀 해 놓고 남는 시간은 무료하게 지냈다. 무료하게 지내기에 무슨 일이 생겨도 하기 싫었다. 잠깐 흐름이 깨어진 무료함은 더욱 무료하게 느껴지니까. 그런 일 한 번 한다고 삶이 달라지지도 않는데 해야 할 의미가 없었다. 자신을 위해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건 어떤지 무얼 배워보는 건, 누굴 만나고 삶의 의욕을 가져 보는 건 그리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는 건 독약이다. 내 것이 되지 못할 것을 탐하다 조금씩 말라갈 테다. 노력해서, 열심히 해서 쟁취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허황한 꿈이었다.


누구에게 무언가 -정당하든 아니든- 요구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 상태. 싫다고 말하느니 내가 조금 힘들고 말겠다는 삶의 자세는 어떤 것을 하는 것에 어려움이 따랐다. 오늘 해야 할 일,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있지만 누군가 -어디 지금 당장- 가자고 하면 따라가야 하는 중요도로 다가왔다. 내가 생각한 계획은 계획이 아니게 되었다. 적금을 들지 않았고 약속을 잘 정하지 않았다. 다음 달에 누군가 돈이 필요할지 모르고 약속한 날 더 급한 누군가 만나자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제나 즉흥적이고 제 멋대로- 무계획으로- 살면서 사람과의 교류를 끊어갔다.


실은 나답게 살고 싶어서일 테다. 휘둘리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싶은 마음. 누구의 의견보다 내 생각으로 내 몸을 움직일 의지가 생겨서일 거다. 만나자는 사람 만나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 연을 끊고 하고 싶은 걸 생각하는 방향 전환. 이제야 나도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휘둘리지 않으려면 자주적이어야 하지만 아직도 남 탓에 익숙하다. 그럼에도 조금씩 내 삶의 지분을 찾는 중이다. 내가 오롯이 내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숙제하는 중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70년대 폭력으로 정당화한 정권의 잔인함. 노동 현장, 재개발 현장..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삶의 터전을 뺏으며 폭력으로 지은 사회. 가진 것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갖게 되는 역겨움, 새벽 3시까지 바늘에 찔려가며 노동을 해도 생활비는 점점 모자라기만 하는 공장 노동자들의 절규. 서로를 알게 되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둘은 붙어있다는걸, 서로 인간임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될까. 어렵다. 어려워서 숙제가 안 된다.


머리가 아프다. 틀어놓고 잔 음악 때문인지 숙제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책임져야 하는 과제 때문인지 남 탓할 거리가 없어 머리가 아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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