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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Jun 10. 2024

방통대 과제 백점 받는 법

이라 쓰고 어그로 끌다(작가님들은 낚이지 마세요!)

문화교양학과 <여성의 삶과 문화>에서는 1학기 중간 과제가 나왔었어요. 저는 양보다 질로 승부하기로 하고 가장 수다 떨만한 장으로 골라보았습니다.


'교재 '1장'을 고른다. 사실과 기분까지 넣어 원고지 30장 채운다'


이렇게요. 교재에는 하녀, 미국 선주민, 유럽을 향하는 난민 문제까지 안타깝고 흥미(?)로운 주제가 많았습니다. 이 주제를? 저 주제를? 하며 고민이 생겼지요. 모유 수유도 할 말이 진짜 많고, 윤석열 정부 탄생에 공이 큰 이분법적 논리인 여성혐오도 알아보고 싶지만, 성토의 장이 되지 않을 만한 주제로 '전족'을 골랐답니다. 실은 유산되고 조리도 없이 이어진 직장생활로 손가락과 발관절이 엉망이 된 것이었지만 그 부분은 사족이라 빼고 정리를 해 보았답니다.

이 글은 브런치 이웃님들을 위한 글이 아닙니다. 어디서 도움에 목매는 저 같은 방통대 초보 학우님들께 예시를 들어드리는 것이 목적이지요. 전족에 관해 쓰겠다면서 사족이 많았지요. 그럼, 글 바로 풀겠습니다.


다음 두 과제 중 하나를 골라 과제물을 작성하여 제출하세요.     

I. 다음 중 한 권을 읽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요약한 후,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세요. (과제물 분량은 글자수 4000-5000[=200자 원고지 20-25]입니다)

a) 권내현,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너머북스, 2021)

b) 루시 딜랩, 『페미니즘들』(오월의봄, 2023)

c) 클라우디아 골딘, 『커리어 그리고 가정』(생각의힘, 2021)

d) 루성옌, 『남성성의 역사』(역사산책, 2023)     


II. 『여성의 삶과 문화』 교재 중 흥미로운 대목 1-2개 장을 골라 요점을 짧게 요약하고, 그러한 내용이 자신의 삶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서술하세요. (과제물 분량은 글자수 5000-6000[=200자 원고지 25-30]입니다)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족은 1,000년이나 지속된 오랜 풍습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의 악습이자 남성 중심 문화 속 여성을 소유물로 바라본 문화다. 전족의 기원 자료는 없지만 상 왕조 주 왕의 애첩 달기에서 찾기도 한다. 여러 설에도 불구하고 전국시대 ‘사기’와 ‘남사’의 고사에서 그 기원을 엿볼 수 있는데 제대로 된 기록은 북송 말이나 되어야 나온다. 그럼에도 유물이나 문학 작품, 그림과 같은 자료는 북송 멸망 이후에나 나오는 것으로 보자면 남송 시대, 그때를 유행의 시작으로 볼 수 있겠다.   


유행의 물이 흐르듯 하행하는 속성에 따라 처음 시작은 궁중 여성과 상류층 중 일부에 전유된 것이었다. 전족의 등장 시기인 북송 때에‘착도저’라는 이름이 붙은 전용 신발도 등장했다. 그때의 그것은 훗날의 전족과는 사뭇 차이가 있어 평평하고 작은 크기의 일반적인 모양의 발이었다. 남송대 정절의 표상으로 의미가 부여되자 원대에는 계층을 불문할 정도로 유행이 가속화된다. 명대에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전족이 장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유행함에 따라 경쟁적으로 발의 크기도 점점 작아진다. 14~17센티미터였던 발 크기가 4촌 이상, 4촌 3촌으로 불리며 차별을 받으니 10센티미터 삼촌 크기인 전족이 표준이 될 만큼 줄어들게 된다. 청대에 들어서는 이것마저 보통의 발로 여겨져 2촌 크기가 등장하였다. 이 정도 발 크기의 여성을 ‘포소저’라 특별히 명명하며 동경하고 칭송하는 문화가 생긴다. 그 말의 뜻이 업혀 다닌다는 것으로 혼자서는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장애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노동하지 않는 여성에 한정되던 전족은 점점 계층을 넘고 지역까지 의미를 잃더니 종국에는 민족의 벽까지 뛰어넘어 소수민족으로까지 퍼지게 된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 뿌리내리고 있던 ‘소중화’ 의식의 조선에서 모방하지 않은 것은 종교와도 같은 믿음으로 대하던 성리학의 영향이 있었다. 정처의 위치가 확실한 조선에서 경쟁의 이유도 없음이었으며 복식의 차이 주거 양식의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도 보인다. 뾰족하고 날렵한 발에 대한 동경이 없진 않았으나 여러 사유로 극단적으로 작은 발에 대한 소용이 없었던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이렇듯 오랫동안 이어진 유행이 서양으로 문이 열리고부터 빠르게 변화를 맞는다. 1870년대 전족 폐지 운동이 본격화됨에 따라 ‘천족회’가 만들어지고 이 모임의 전국화와 서양인의 전족 비판 문화는 중국 지식인을 중심으로 강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1890년대 중국 내부에서 시작된 ‘부전족운동’을 시작으로 전족 폐지령이 내려지고 중국인들에게도 야만적인 문화이자 수치스러운 악습으로 인식되어 간다.

남성이 발명한 비인간적이며 잔인한 제도의 소멸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한 기능이 있었다 할지라도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었다.      


내 발은 245다. 나는 1970년대 태어난 여자다. 태어나고 자랐던 20세기 대한민국 평균으로 보자면 큰 편에 속한다. 어릴 때 내 신발 크기는 235였다. 지금과 같은 키였고 직장생활을 하는 성인인, 성장이 멈춘 상태에서 신었던 크기다. 때를 기다려 몸을 말던 꽃봉오리의 움이 튼 것처럼 키가 자란 것이 아니다. 신발 크기를 재는 단위가 바뀌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때도 여자는 발이 작을수록 예쁘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것은 발이 작아야 이쁘다는 소리보다는 여자가 발이 왜 그렇게 크냐는 식의 타박으로 표현되었어도 의미는 그러했다. 두 치수를 작게 신으며 산 30여 년의 시간 동안 겨우 고 정도의 치수 변화였는데도 출산 후 산후 회복이 되지 않을 만큼 통증이 왔다. 인어공주가 마녀에게 목소리를 주고서 받은 다리로 첫발을 딛던 그때의 고통이 이러했을까 생각할 만큼이었다. 아침은 특히 더했다. 첫발을 디디기가 겁이 날 만큼 따갑고 저렸다. 남들보다 더 긴 시간을 몸조리하며 되도록 아껴도 통증은 꽤 오래가는 것이어서 겨우 발의 통증으로 끝나지 않았다. 산책하는 일도 가벼운 운동도 버거웠었다. 잘 회복되지 않는 관절은 온몸의 회복을 더디게 했고 그렇게 깨어진 균형, 임계점을 넘긴 통증은 삶에 영향을 미쳤다. 추슬러지지 않는 몸은 잦은 유산으로 이어졌고 여전히 아침마다 새로운 고통으로 찾아왔다. 최대한 발을 쉬며 회복시켰다. 발에 맞는 신발을 신고 하이힐에서 내려와 십 년 가까이 편안한 자세로 조금씩 걸었다. 작고 높은 구두에 맞춰져 있던 굽혀졌던 발가락과 사라졌던 아치가 제자리를 잡아갔다. 아마도 한껏 움츠리고 산 발가락과 뼈들이 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통증이 더욱 심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도 하게 된다. 족저근막의 염증도 발목터널증후군도 그렇게 오랜 시간을 거쳐 사라졌고 굳은살 박인 채 펴지지 못했던 발가락도 펴지니 삶을 향한 의지도 펴졌다.     


한창 달리기를 좋아할 나이다. 혼자 밥도 먹을 수 있고 본인의 육체에 효용도 느끼는, 젓가락질이 되는 나이겠다. 서너 살에서 일곱까지의 아이다. 그런 아이의 발을 동여맨다. 며칠 후 점점 더 동여매 묶는다. 엄지를 남긴 나머지 발가락을 발바닥에 굽혀 붙인 후 싼다. 뼈가 부러진다. 변형된다. 부러진 뼈로 걷게 한다. 그 발가락이 발바닥에 잘 겹치도록 다그치며 걷게 한다. 그렇게 몇 년 종이비행기를 접듯 작게 접어간다. 더 작은 신발로 옮겨 넣는다. 발등은 솟아오르고 발가락이었던 뼈들은 부러져 기능을 상실한다. 평범했던 잠깐의 시간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고통이 일상을 차지한다. 걷지 못하니 집 안에서만 생활한다. 어제까지 없던 감옥이 둘러쳐져 있다. 그렇게 의지가 생기기도 전의 어린 나이에 사회가 만든 후천적 장애인이 되었다. 많은 수의 아이가 패혈증으로 죽어갔다. 그러나 전족이 되지 않은 발로는 결혼도 할 수 없다.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차별받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다. 혹은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신분을 위해 선택되기도 했다.


전족 얘기는 어릴 때 들어본 적이 있다. 중국에는 발이 작은 게 이쁜 여자의 조건이었고 양귀비는 발이 작아 누구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췄다는 식의 사실인지 확인도 되지 않은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이며 자랐다. 사실 그 말을 들었을 때 발이 더 이상 크지 못하게 작은 신발을 신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내가 한 것과 같은 정도로 말이다. 그저 한 치수 겨우 두 치수 작은 신발을 신고 다니면서도 불편함을 토로하곤 했는데 그것보다는 더 강한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만 했었다. 실상은 폭력적이고 비인도적인 일이라 감히 상상치 못했겠다 싶다. 아프리카계 여성 와리스 디리가 쓴 ‘사막의 꽃’과 중국 여성 싼마오가 쓴 ‘사하라 이야기’에 여성 할례의 내용이 있다. 사회 곳곳에서 풍습에 따라 목숨까지 잃을지 모르는 일을 감행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와리스 디리의 친언니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점을 잘리는 할례를 받고 패혈증으로 죽게 된다. 정절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여성의 안전과 목숨은 쉽게 간과되곤 한다. 잘못 규정된 풍습, 허울에 목숨은 치환된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주도하는 사회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여성은 속박받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의 비율이 적었던 중국에서 여성의 활동성을 없애 집 안에만 있게 하는 전족 같은 경우처럼 말이다. 사회 지도층에서 권장하고 독려했다. 정절을 지키게 한다는 명분으로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한다거나 여성에게 온몸을 가리는 부르카를 쓰게 하는 경우로 나타나듯이 말이다. 여성이 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남성만이 생명 유지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러한 환경에서 거부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도, 사회를 바꾸기 위해 왜 노력하지 않았느냐 강변하긴 힘들다. 그런 행위를 선택으로 보는 것은 불합리할 수 있다. 그러한 악습을 없애지 않았느냐 말할 수 없다.


어릴 적 주 양육자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유아는 이뻐야 한다. ‘아동학’에서 유아기 사랑받는 경험은 자아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귀엽고 이쁘기에 사랑받는다는 개념이 형성되는데 그에 따르면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경우 못생겼다는 자아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내 경우도 바쁜 부모님의 무관심과 “그렇게 행동하면 다쳐서 다리 부러지지” 하는, 어떻게 보면 비난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나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살았었다. 그런 연유로 밉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그것은 여러 갈래 결과로 나타났다. 발이 크면 미우니 더 키우지 않으려 한다거나 치아가 삐뚜니 교정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표출하였다.

여자의 사회생활이 자유롭지 못한 사회라면 본인의 목숨은 가장이라는 권력자에게 달렸다는 위기감이 있었겠다. 그들이 원하는 상에 맞추어 살아야만 했을 테다. 그것이 곧 장애를 얻는 것일지라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 이러한 과거 풍습을 끔찍한 악습으로 치부하고 옛날 일이라고만 하기엔 아직도 무언가 개운치 않은 점이 남는다. 지금 사회는 누구든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고 교육의 기회도 동등하다.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지 않고 남성도 가장의 모든 역할을 떠맡는다는 생각에서 놓아진 면이 있다. 차별받는 장애인이 아니라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고 독립된 한 인간으로 살 수 있겠다. 필요하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교육 더 많은 월급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과거 전족과도 같은, 여성을 옥죄었던 물건인 코르셋 기능의 속옷을 입고 제모를 하며 화장하는 것일까? 아직도 높은 구두에서 내려오지 못했을까? 이가 삐뚤다는 이유로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교정을 선택하는 것일까?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수술들을 감행하는 걸까? 남성이라고 자유롭지도 않다. 피부과에 가서 레이저 시술을 받고 성형 수술도 감행한다. 지금의 잣대로 보자면 전족은 그저 끔찍한 옛날 악습으로만 보인다. 여성을 집 안에 가두고 성적 대상으로 대를 잇는 도구로, 재산으로 생각하는 존재였던 그때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바꾸어 보면 그 시대 남편의 존재는 회사 사장님이 되었고 권력자는 고용인 혹은 돈을 주는 존재로 바뀐 것이 아닐까. 끔찍한 자기 학대는 장애인이 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타고난 본래의 몸을 왜곡시키고 다르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전족의 악습은 절대적이고 무조건 사라져야 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권력자에게 맞추는 심리 혹은 생명 연장을 위한 선택은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비슷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원주민 문화를 소개하는 텔레비전을 본 적이 있다. 그 영상에서는 성인이 된 사람의 이를 뾰족한 칼과 정으로 내리쳐 깎고 있었다. 미개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 문화를 보고 받은 충격은 제대로 된 치과에서 멀쩡한 생이를 뽑는 교정과 겹쳐 보였을 때다. 치아가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틀렸다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보여 많이 놀란 적이 있다. 고르지 않은 나의 이는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보여주었다.


전족의 풍속은 얼굴을, 이름만 바꾸며 목숨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통신대학 여성의 삶과 문화' 과제로 제출한 내용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점수는 백 점. 그러니까 중간 과제물 총점으로 30점이었으니(다행히 엉뚱한 과제 낸 과목'아휴~~말도 마세요. 기말시험에 또 엉뚱한 행동을...' 제외하고 모두 30점 받았으니까 다른 과목도 가능하면 예시로 올리겠습니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예시로는 꽤 쓸만해 보여서요. 과제 사고파는 곳 외에는 도움을 받을 곳도 적고, 선·후배, 동기 학우를 만날 일도 적은 방통대라 조금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참 다행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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