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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Jun 16. 2024

누구를 위하여 외박을 말하는가

마누라? 남편?

  

젓가락을 왜 두 개나 꺼냈어?

어, 하나는 김치 던다고….

왜 앉아?

젓가락 그냥 씻기 아깝잖아

시후랑 먹을라고 라면 두 개밖에 안 끓였는데?

한 젓가락밖에 안 먹을 거야

뇸뇸


저는 라면 안 먹는다 해 놓고 한 젓가락만 뺏어 먹는 그런 파렴치한이 아닙니다.

그저 남편이 안 물어봐서 대답을 안 했을 뿐이지요.

게다가 먹지도 않은 젓가락을 씻다니 물 아깝지요. 꺼낸 김에 쓴 김에 먹는 것일 뿐. 에헴



남편이 외박했습니다. 전날 술을 먹었기 때문에 해장하느라고 아점용 라면을 끓였고요.

어디 남자가 외박을!!! 할 수도 있겠지만 부산 친구들과 2달에 한 번 있는 모임 날이어서 매번 그러하듯 자고 온 것입니다. 쌍방 합의가 된 정기적 외박이란 말씀이지요.


보통 결혼한 여성이 친정이든 어디든 가서 자고 온다고 하면 남성들, 무척 설레고 행복해합디다. 아마 아내들의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어서겠죠? 아내 덕 혹은 탓이든 나이 때문이든 신분(남편, 아빠)상 본능을 놓고 어른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엄(마같은) 마(누라)가 없는 사이 버릴 수 있어 좋을 겁니다. 내 속에 활발히 살아있는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을 뜯고 씹고 실행하고 즐기고 하려고요. 잠깐의 꿀 같은 휴가일 겁니다. 혹 하루 더 자고 온다는 연락.... 안 오나????


남편이 연락 두절로 집에 안 오고(차에서 자고 있습니다), 술 먹는다고 외박을(정기적으로), 야근한다고 회사 숙직실에서 자고 온다(새벽 4시 반에 업무가 있을 때)는 연락을 가끔 해요. 큰일이죠? 남자가 집을 나가다니 말이에요. 마누라 눈치 보지도 않고 당당하게 말이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요, 좋아요. 희한하죠? 저는 남자도 아닌데 말이에요. 아이코 이 남자 정신 못 차리네~ 어디서 또 뭘 하는 거야?? 하는 마음보다 오예~ 싶습니다. 보통 부인들 어떤가요? 아무래도 제가 좀 엄마 같은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 거 같아요. 책임감 강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할 일 해내는 든든하고 어른스러운 엄마말이에요. 식구들보다 일찍 일어나 들불처럼 화라락 일을 몽땅 태워버리고, 외조도 아이들 학교, 학원일도 자신의 바깥일까지 진짜 어른처럼 척척 해내는 그런 사람이요. 힘들어 눈물이 날 만큼 벅차도 맡은 자리가 버겁다고 던져버리지 않고, -그럴 수 없어 못 하든지 어쨌든- 견디면 이기는 거라며 하루를 물레처럼 돌리는 분들 말이에요(말하다 보니 너무 힘들겠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대부분 어른들의 삶이 이러하겠지요?) 시간 일부러 내서 낮잠이나 자고 집에 회전초가 굴러다닐 때까지 책이나 보고 있는 그런 엄마인 저와는 후천적으로 다른 분이요. (태생적으로라고 할랬더니 그분들의 노력과 정신력을 간과하는 말 같아 뺍니다)


남편이 없던 지난밤 살림은 퍼질러 놓고 소파에 더없이 편안한 자세로 누워(저는 앉아 있지 않습니다. 주로 집에서 누워지냅니 ㅋㅋㅋㅋ집 나가면 누울 수가 없어서 안 나가는지도 몰라요) 빌린 책을 읽었습니다. 보통 같으면 아직 안 자고 뭐 하노? 남편이 건네는 말에 뜨끔해서는 쌓인 설거지가 얼마나 눈에 띄나 머리나 굴리고 있었을 텐데 아주 느긋합니다. 밤이 주는 이완과 남편이 없다는 자유로움과 내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에, 한정된 몇 시간이 너무도 소중합니다. 이 밤의 끄트리를 잡고 뭐든지 하면 될 것 같고 무엇이든 다 재밌을 것만 같습니다. 타이머 장착된 시간여행을 조금만 더 만끽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결국은 별거 없는 밤이었더라도요.


혹시, 남편들에게 아내 외박 통보가 이렇게 달콤한 거라면 이해할게요. 마누라가 무서워서, 엄마 같은 마누라가 싫어서도 아니라는 거요. 그저 한정되어 있기에 소중한 리미티드 에디션 모나미 153 같은 거겠구나. 그게 엄청난 보물이라서도 비싼거라서도 아니라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런거구나...하고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내분들 친정에서 하루 자고 오는 거 어떠세요? 안 돼요? 할일이 많다고요? 예.....


오늘 그릴 집 앞 주택


재봉틀학원이던데.. 배울필요는 없는데 가게가 이뻐서 들어가보고 싶어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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