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걸어오는 걸 보자 마침 2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던 분장사와 최 선생님은 반가운 얼굴이다.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시간 맞춰왔을 뿐인데. 모두를 제치고 내가 먼저 도착한 모양이다. 무리에 합류해 지하로 가자 펼쳐진 의자, 모두가 착석할 자리 앞에는 우리의 역할과 이름이 적힌 안내지까지 있다. 현장 준비는 마쳐진 듯.
1등 도착이라 화장도 일등 받는다. 머리는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장사께서, 화장은 제자들로 보이는 분장사가 해준다.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4명이라 그런지 속도감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렇게 오래 해주나? 분장이 어려운 얼굴인가? 큰가? 에헴. 안경도 벗어 놓고 화장하고 있으니, 누군지 모르는 눈치다. 합을 맞추는 옆자리 만우스님마저 못 알아본다. "아이고 스님! 저 고 씨예요! 눌질덕이. 아…. 예?" 분장의 힘인가? 화장이 그렇게 잘 되었나? 이쁘다느니 못 알아보겠다느니 하는 덕담에 기대도 없던 내 얼굴이 슬 궁금해진다. 뻔한 얼굴 궁금할 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분장과 환복을 하니 할 일이 없다. 나야 그림 그릴 것도 글 쓸 타자기도 가져왔지만, 옆 짝지는 지루한 얼굴이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1층으로 가 두리번거린다. 커피를 주문하려고 보니 주인공 역 흰고무래가 간식을 싸 왔다. 빈대떡에 커피, 주스까지. 주인공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다음에도 주인공은 사양해야겠다. 이상한 지점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샌드위치를 준비한다는 말에 아침만 먹고 왔다. 저녁때 하는 연극이라 저녁 공연 전에 준다는 말이었는데 점심도 굶고 와서는 뭘 좀 먹고 싶던 참, 진심 반갑다. 넉넉해 보이긴 하지만 배부를 때까지 먹을 순 없을 터, 모르겠고 혼자 두 개나 먹는다. 그러고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에 커피까지 벌컥벌컥 마신다. 커피숍 사장님(극단 현장 단원)이 오늘 너무 바빠 커피 안 시키면 좋겠다는데도 굳이 시켜서 말이다. (이런 커피숍 있으면 멀어도 찾아가고 싶은데. 공짜로 자리 제공)커피에 부침개까지 먹으니, 허기는 조금 가신다.
최근 굶고 먹기를 반복했더니 보관용 살이 올라서는 자주 배가 고프다. 원래 무게로 돌아가야지. 그러려면 부지런히 자야겠지? 자면 살이 빠지는데 요즘 바쁘게 산 게 몸무게 증감에 도움을 준 것 같다. 게을러야 살이 빠진다니. 게을러도 부지런해도 장단점이 있네 그려.
1시에 도착해 지금은 3시. 연습도 없이 화장과 의상만 입고 있으니, 조바심이 난다. 연습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연습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 합류한다. 백촌 선생님 연습 장면에선 흰고무래가 되었다, 홍매 연습 장면에선 꼭두쇠 대사를 친다. 연습이 되는 건지 장난을 치는 건지 모르겠다. 내 역도 아닌 역에 목을 썼더니 헛기침이 나온다.
선천적으로 목소리가 작아 큰소리 연습 몇 번에 목이 간다. 연습 두 번에 이미 소리가 지하수다. 잠겨 버렸다. 말을 줄여야지. 하지만 모두의 기분도, 화기애애함도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수준이라 잠시도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웃고 떠들고 대사 연습에 목 상태는 더 엉망이다. 그럼에도 이 시간이 영원하면 좋겠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마음이 모아진 상태, 일심의 환경이 어디 흔한가? 번뇌도 욕심도 들어올 자리가 없는 이 순간, 지극한 행복함이 든다.
4시 최종 리허설.
연습인데도 떨려 실수 연발이다. 여기저기 너만큼이나 나도 나만큼이나 너도 실수다. 선생님의 마지막 정신 부여잡기 특훈이 이어진다.
틀려도 뻔뻔하세요. 밀고 가셔야 해요. 나는 배우다! 생각하세요. 틀렸다고 쑥스러워하고 멈칫멈칫하시면 안되고 그냥 쭈욱 가는 거예요. 그게 중요합니다.
그래 실수는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중 누구도 첫 공연을 완벽히 할 수는 없을 테다. 실수가 숙명이라면 그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 실수를 자연스럽게 여기자. 아무 일도 아닌 듯 대사의 일부인 양. 이런 흐름은 사전에 준비된 계획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할 것. 그것만이 중요하겠다. 오늘, 실전은.
대기실로 들어가세요.
벌써요?
6시30분이에요
헐…. 시간이…. 잘 간다. 40분부터 입장할 관객을 기다리며 암흑 속에 앉아 있다. 우리가 초대한 사람들. 나를 아는, 내가 아는 사람임에도 긴장이 된다. 남 앞에 얼굴을 드러내며 입을 뻥긋거리는 것에 거부감이 컸는데 대놓고, 보란 듯 하겠단다. 모르는 사람 앞이라면 내 얼굴이 가면인 듯 굴 수 있지만 가족, 친구 앞에 이런 낯선 모습을 보여야 한다니 갑자기 괜한 짓을 한 것만 같다.
나오세요.
호출이다.
두근두근
한창 커튼콜 연습 중인 홍매에 들이댄다. 긴장을 풀기 위해 부비부비 춤을 춘다. 더티 댄싱 한바탕.
와그르르 웃음이 터진다. 제 마누라 우아지예요.(홍매가 우아지 역도 같이 함) 제가 눌질덕이 아닙니까 하하하
답지 않게 설쳐보아도 긴장이 깨끗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냥 하자. 긴장 풀겠다고 신경 쓰면 더 긴장하게 될 터. 긴장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그게 없다면 예민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힘들 듯. 그래 하던 대로 해보자.
출석함 불러봐라
배건네 갖바치 고 씨 왔나?
여, 왔다!
연극의 막이 올랐다.
-끝-
배우분들만 얼굴 공개했습니다. 허락을 득하지 않은 관계로 제 얼굴 포함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ㅎㅎㅎ저도 허락하지 않.. 뒷줄 오른쪽 세번째. 고씨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