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달리지는 않고 달릴 소리만 하는 글쓰기) 숙제가 달리기인데 나는 도대체 언제 달리나... 못 달릴 경우를 대비해 일단 달리기 전 글이라도 몇 개 써 놓으려는 얄팍한 수작임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중복적인 내용과 성의 없는 흐름과 억지스러운 희망이 담겼음을 이해하기를 바라며 슬쩍 발행 누릅니다.
나는 이런 말을 할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소싯적에는 말이야…. 로 시작하는 성공의 역사. 미화되다시피 한 과거 회상 같은 거 말이다. 안타깝지만 그리 잘나지 않은 다방면의 나는 내세우고 드러내길 좋아하는 내 성향과 배치되어 무척 특이한 조합을 이루었다. 자랑하고 싶지만, 자랑할 게 없어 자신을 놀리는 재미로 사는 사람 정도랄까? 자랑은 해야 하는데 할 것이 없다는 것의 부작용이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내가 어? 어떤 사람인 줄 알아? 나는 말이야 구구단도 못 외워. 내가 말이야 얼마나 길치인지 알아? 니가 고향도 못 찾아가는 그 기분을 알아? 라테는 말이야…. 라고 시작하지만, 자폭 개그로 끝나는 내 얘기다. 그럼에도 내 얘기를 구체적으로 해야 할 때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내 얘기를 하고 싶은 자에게 브런치는 귀를 제공하니까. 더없이 고맙고 고마워서 고맙다. 일단 고마운 마음부터 좀 전하고 시작하자.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때다. 6학년 때 체육 선생님이 뜬금없이 교실로 들어왔다. 수업 중이던 선생님과 샤바샤바 후 나를 나오라 지목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공부 못하는 모범생이라 선생님께 지적받을 일도 칭찬받을 일도 눈에 띌 일도 없는 아이라 심히 당황할 수밖에. 무슨 일일지는 모르지만 '착한….'인 까닭에 고분고분 칠판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선생님은 모든 친구가 보는 앞에서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무슨 추행을 했다는 게 아니라, 다리를 만져보더니 과제를 던졌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육상부 들어가도 되느냐 여쭤봐라" 살다 살다 선생님께 지목을 받고 모든 아이가 보는 앞에서 주목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보니(6학년 오락부장을 한 경험으로 교단 앞에 선 적은 있다. 웃기는 아이라나 어쩐다나) 내가 뭐쯤 되는 것 같고 우쭐했었다. 이렇게 주목을 받으며 나는 우리 학교 육상 꿈나무가 되는 건가? 즐겁게 집에 갔다. 당최 인생에 중요한 게 없던 시절임에도 잠깐의 주인공 역에 고무된 나는 잊지도 않고 부모님께 중대사를 털어놓았고 단호한 대답은 "내 눈에 흙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문, 무관 모두 국가 통치에 필요함에도 굳이 그 옛날부터 이어져 온 문관 우대 사상은 우리 집까지 이어져 내려온 거였다. 농업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은 왕조 국가에서 상업을 말업으로 삼았던 역사에 비추어 그 '말업'을 하고 있는 구멍가게 장사치들이 운동을 천하의 천한 것으로 여긴 거다. 물론 무척이나 재주가 뛰어나 선생님이 찾아오시면서까지 읍소를 했다면 또 그 우쭐한 마음을 연료 삼아 운동을 시킬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그 정도로 명성을 얻고 세간의 관심을 받던 재능 소유자도 아니었던 나. 그러잖아도 별 볼 일 없이 장사나 하는 집 딸이 공부도 아닌 운동한다는 또 '별 볼 일 없는' 조합이 마음에 안 드셨던 까닭이다. 그게 얼마만큼 인생을 바꾸고 내 성공과 성취에 도움을 주었을지는 모른다. 뭐 설사 그게 아니었더라도 체력은 키워줄 수 있었을 텐데, 부모님의 일언지하 거절은 그런 (체력은) 국력을 키울 방편마저 날아가게 했다.
인제 와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이어달리기나 달리기에 반 대표로 나가곤 했으니 그때 눈여겨본 선생님께서 찾아오신 걸 수도 있겠다. 나는 그냥 선생님이 키 큰 애 "나와" 했고 그 애 종아리를 만져보고는 잘 달릴 상이다(종아리 어디 부분에서?)…. 판단한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 당시 백 미터 15초 뭐…. 을 뛰었으니 빠른 편이긴 했다.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출중한 재능은 없지만 연습으로 기능을 올릴 수준이었다고나 할까.
우리 집은 (부산) 황령산 자락이 아름답게 뻗어있는 산 중턱이었다. 내려가면서 쉬는 구간이 몇 군데 있는 걸로 봐선 산언덕이 제법 많았던 곳을 깎고 집을 지은 동네였을 거다. 지금은 (뷰맛집)아파트가 차지해 그곳을 다시 볼 수 없는 관계로 할 수 없이 상상이라도 하고 싶다면 지금까지 남아있는 -부산의 경치 좋은 달동네- 벽화마을을 찾아보면 될 성싶다. 그렇게 높디높은 곳에 살면서 학교를 뛰어서 다니느라고 최단 기록을 경신하곤 했었다. 학교 가는 내리막길. 초등학교 600미터 O 분 주파. 중학교 1킬로 O 분 주파…. 500미터 고등학교 2분 만에 주파, 매번 실패. 그 후 지각생으로 낙인찍혀 선생님께 전화 받음. 뭐 이런 기록과 전과와 역사.
라면만 먹고 뛰었다던 임춘애처럼 마른 몸을 한 나지만 역시나 그런 연유(임춘애와 닮은 몸매)로 내게 달리기와 다리 근육과 허벅지와 걷기 같은 것은 무척이나 일상이었고 편안한 것이었다. 그러니 오래달리기, 마라톤, 단거리 달리기 뭐든 마르고 긴 나에게 어울리는 종목이었을지도 모른다.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지만, 서면에서 전포동 산을 넘어 문현동까지 걸어서 다니거나 돌아서 다니며 자주 걷던 어린 시절도 보냈다. 약하게 태어나 자주 앓고 아팠고 누워있었던 (더) 어린 시절을 났지만 그렇게 자주 뛰어다니며 건강을 만들어 간 게 아닐까 싶다.
직장을 다니며 뛰어다닐 거리가 아닌 곳을 회사로 삼고, 뛰기엔 다소 기능이 떨어지는 하이힐을 상시 착용하며, 뜀박질은 출근길 버스에서부터 회사까지…. 택시에서 내려 회사까지…. 가 다였던 기간을 보냈다. 운동 부족과 나쁜 생활 습관 등으로 망가진 관절은 무릎에 주사기를 꽂아 물을 빼는 것으로, 굽혀지지 않아 방 닦는 건 포기하는 식으로 편해진 건가 싶게 나빠졌고, 이대로는 안 된다 싶어서 가본 병원에서는 종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수술하자는 걸 몇 군데 교차 검진한 결과 한 병원에서 재발의 우려가 99%에 신경에 너무 붙어 있어 까다로운 수술인 데다가 무릎이 굽혀지지 않고 아픈 건 다른 연유에서 그런 거니 "종양은 놔두자"는 결론을 들을 후 이렇게 별 일없이(?) 살고 있는 내 무릎과 관절의 변천사.
달리기라. 과거 소환 이벤트겠다. 달리기를 끊은 지 어언 30년. 무릎이 붓기 전 가끔 헬스장에서 달리곤 했던 일을 빼면 달릴 일 없이 살았던 최근. 갑자기 달리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단 궁금함. 특히 내 무릎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이겠다. 무릎이 정상인처럼 대충 삐걱대더라도 견뎌줄까? 과연 나도 운동다워 보이는 운동인 달리기를 할 수 있을까? 나도 내가 무척 궁금하다. 달리기라는 매력적인 종목을 미지의 세계 탐험하듯 새롭게 알게 되리라는 기대, 퇴화하여 무용하다 생각한 무릎이 알고 보니 뜀박질도 오래달리기도 되는 보통의 것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나에게만 탐험이 허락된 미지의 무릎 연골- 인류 최초로 발견할지 모른다는 기대. 시작은 뭐가 뭔지 구분도 못 한 상태로 했지만 나올 때는 꽤 성과가 있을지도. 최소 하나의 사실은 알고 나올 테니 가성비는 있는 헛발질일 테다. 그러니 안 할 이유보단 할 이유가 많다고 보고, 달려보자. 돌풍을 동반한 이 비만 그치면. 어두워 시야가 좁은 첫 '달릴자'에게 발목 부상의 위험을 줄지도 모를 밤만 지나면. 달릴 자에게 누가 봐도 완벽한 날이 오면 나는 분명 달릴 것이다. 완벽한 날은 흔하게 찾아오는 거니까. 에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