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에서든 어깨춤을 발사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에 사시사철 방송가를, 길거리 영업장을 감싸는 트로트의 기운을, K-팝 즐기기를 외면하기는 눈앞에 구워지고 있는 소고기 안창살, 살치살이든 돼지 삼겹살이든 보면서 참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물론 참는다는 것도 이렇게 반대로일 수 있나 싶겠지만. 술 권하는 사회가 저물어가야 할 문화라면 노래 권하는 문화는 술과 함께 사라질지 모르나 노래를 잘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즐기고 싶은 마음도, 기쁘고 슬픈 감정을 극대화해 줄 도구로써, 결혼식을 빛내기 위해, 상사의 눈에 들기 위해 등등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전주가 나오고 있는 이곳은 노래교실, 아니 보컬 수업 교실이다. 날 사랑하지 말아요. 너무 늦은 얘기잖아. 애타게 기다리지 말아요. 사랑은 끝났다며 얘기하는 이은하 목소리와 겹쳐지지 않는 수강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노랫소리는 모깃소리만큼 여린데도 자극적인 감각으로 귀를 파고든다. 날것이 주는 선명함이 생경함을 만들었다. 저렇게 잘 들리는 작은 소리는 처음 듣는다.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 아니 세상에. 도대체 잘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 게냐... 라 묻는다면 단 두어 개라 항변할 수밖에 없다. 사실 망상으로는 잘 이쁘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잘 공부하고 싶고 잘 애도 키우고 싶고 잘 늙고 싶고 한 "잘잘잘잘"의 희망 사항 덩어리지만 진심으로 '잘'을 붙이는 건 세 가지다. 노래, 글, 그림. 그 외에는 진정 잘하고 싶다며 타인에게 까지 말해본 적이 없다.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 수영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은.. 지금 굳이 생각해 보니 잘하면 좋겠다 싶긴 하지만 잘하고 싶다는 불타는 욕망은 없다. 재능이나 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 것에 잘하고 싶다는 접두어를 붙이진 않는다. 화장을 잘하고 싶다. 파스타를 잘 만들고 싶다는 말처럼 관심 밖의 일이다. 하지만 노래는 다르다.
일단 노래를 못 부르지 않는다. (한국인 중에 노래 못 부르는 사람 찾기도 쉽지는 않지만)
어릴 적 20시간 가까이 집안을 채우는 음악을 들으며 살았다. 음악만이 주변을 채우는 판소리 명가에서 자란 것도 나이트클럽 작은 방에서 자란 건 아니지만 우리 집에선 언제나 음악이 흘렀다. 그 음악을 듣던 부모님은 손님이 뜸한 틈을 타 그 노래를 따라 부르시거나 듀엣을 부르곤 하셨다. 손님 혹은 시간 때로는 환경과도 분리되어 노래로 들어가는 집안 분위기에서 내게 노래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불러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누가 봐도 말씀 없고 항상 점잖아서 샌님 같아 뵈는 아버지가 노래가 있는 자리에서는 빼지도 않고 부르는 모습에 남편은 놀라곤 했다)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한 대학생 시절. 노래방은 대학 문화로 자리 잡았고 1시간 1만 원이던 노래방은 1시간 1만 원이라는 안내가 무색하게 추가 시간 추가 시간이 제공되어 언제나 1시간짜리 노래방 행이 두어 시간 질펀한 음료 가무로 마쳐지는 수순으로 가곤 했다. 그렇게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에 시작한 노래방이 밤 문화를 마친 자의 2차 3차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져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었다. 현실 인식에 무리가 될 정도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밤을 경험하고 나왔지만 밖은 아직도 해가 떠 있어 더 어리둥절해지는, 하루를 다시 사는 기분으로 마무리되곤 했었다.
노래방 같은 분위기의 교실에서 수강생들은 한창 노래 중이다. 몇 분이 노래를 끝내고 나면 내 순서도 돌아오리라. 노래를 배우러 왔는데 남 앞에 노래하기 싫다는 감정부터 극기로 넘겨야 할 판이다. 노래를 한다는 건 혼자서 즐기고 심취하며 간직해야 할 취미라기보단 타인과 나누고 공유해야 하는 어떤 것인지도. 밝게 켜진 불과 지적과 조언과 훈육이 곁들여질 노래라니. 무언가를 익히고 습득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어떤 것 한 가지라 규정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