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 말라고 얘기를 했건만 안 들린다. 계산대까지 가져와 엄마를 조르고 있다. 왕구슬 아이스크림을.
"엄마는 안 사준다고 했다!" 그래도 굳이 물건을 올려놓고 룰루랄라 노래를 부른다.
"보자, 얼만지, 이리 줘봐. 삑. 천 원이네. 천 원 줘" 엄마 마음도 풀어줄 겸 아이와 얘기를 시작한다.
"자요, 돈이에요" 종이를 4번 접은걸 돈이라며 내민다.
"그래 이리 내" 내가 곧이곧대로 믿고 가져가려 하자 화들짝 놀란다.
"아니에요. 돈 아니에요."
"아닌데, 돈 같은데."
"아니에요. 보세요. 그냥 그림이에요."
A4종이를 펼쳐 종이에 그려진 그림까지 보여준다.
"보세요. 인어공주 그린 그림이에요."
장난을 이어갈 생각도 잠깐 잊고 그림 감상이다. 파란 머리에 물고기 꼬리는 빨간 비늘이 덮인 웃고 있는 인어공주다.
"와, 그림 엄청 잘 그렸다. 이거 줘라 잘 그린 그림."
"안 돼요. 이거 돈도 아니에요."
"그럼 엄마한테 계산하라고 할까?"
"예"
"잘 그린 그림 아줌마가 천 원에 사줄랬더니. 안 줄 거야?"
"예"잘 그렸다니 더 소중해서는 가슴으로 가져가 꼭 쥔다. 그 모습이 더 귀여워 아이가 하는 짓을 눈으로 좇는다. 계산은 자기 일이 아닌 걸 아는지 아까 부르던 노래를 마저 부른다. 랄랄라~~ 랄라~(음이 개구쟁이 스머프 음으로 들리는 건 왜인지) 신발은 어디다 벗었는지 이사도라 던컨처럼 춤이다. 노래까지 얹어서. 사는 게 즐겁다는 표현을 온몸에 담아 표현해 낸다.
아이의 엄마는 신발은 왜 반쯤 벗었냐며 혼을 내고 아이는 엄마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주저앉아서 미니 멜리사 지그재그 5 젤리슈즈 믹스실버 찍찍이를 채운다. 신발은 누가 사줬는지 이쁜 신발 사주는 엄마 있어 좋겠다는 얘기를 연신 해대며 나는 입이 바쁘다.
'저렇게 말 해대면 피곤할 텐데 에너지를 좀 아끼고 일이나 열심히 하지'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바쁜 척 과일 정리하는 사장님을 잠깐 쳐다본다. 하지만 사람들과 농담과 장난을 치지 못한 날은 무척 우울하다. 그냥 내가 자동 계산대가 되어 계산만 한 그런 날은 다음날 일하러 가기가 싫어질 정도다.
어릴 적 엄마는 물건 사입과 주부일에 동네 계주(곗돈을 넣어 금반지를 사거나 목돈 만드는)를 도맡아 하는 바쁜 여성이기도 했고 주 수입원인 가족 사업 가게는 아버지가 가장답게 붙박이로 하고 계셨다. 그곳을 동네 사람들은 참새 방앗간처럼 들렀다. 퇴근한 아저씨들이 원할 때면 입은 없고 귀만 있는 사람이었고. 바쁜 부모를 대신해 장난을 쳐주고 도둑질도 눈 감아주는 주인장에 대한 믿음으로 가게엔 항상 사람이 있었다. 낮, 아이들이 차지한 가게에는 항상 웃음이 흘렀다. 돈이 없어 물건만 한 시간째 뒤적이고 있으면 아이의 말동무로 울적한 마음을 지워주셨고. 엄마 심부름 온 기특한 아이에게는 이 천 원짜리를 "이 만원이다" 하며 근엄하게 얘기해 아이를 웃겨주곤 하셨다.
물론 그렇게 열심히 사입하고 힘들게 가져온 물건을 외상으로 줘버리고 도둑질을 해도 크게 엄벌에 처하지 않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무척 원망하고 비난은 하셨으나 그와 반대로 아버지는 동네에서 좋은 분이셨다. 어머니를 만족시키는 남편은 아니셨을지 모르지만 다수의 좋은 사람으로. 뭐가 좋은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엄마도 이해가 되고 아버지의 홍익인간 이념도 이해는 되니까. 두 분다 성격이셨던거니까.
어릴 적 해본 일이니 접근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 슈퍼일. 층간 소음으로 집에 있으면 힘들때가 많다. 아직도 슬리퍼는 신지도 않고 걷는 윗집 사람들의 발걸음이 길어지면 갑자기 숨이 턱 하니 막혀버리니까. 다시 악몽이 시작되는가 싶어 당장 어딘가로 달려 나가고만 싶다.
쉽게 구한 일이고 쉽게 적응하리라 생각한 계산원으로의 일은 자꾸만 어린 나로 되돌아가는 직업 같다. 오늘 '던컨'처럼 춤추던 아이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또 갑자기 아버지가 호출되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딱 내 나이 때 그 파마 한 것 같은 이쁘게 구불거리던 긴 머리를 하고 있던 48살의 키다리 아버지. 농담을 좋아하고 장난을 안치면 눈속에 가시가 돋던 어릴적 골목대장을 오래 역임하셨다던 아버지가. 지천명을 눈앞에 둔 나지만 아직도 아버지와 가까워지는 법은 모르겠다. 언제 철들까 싶은 싱겁게 아빠를 닮은 딸은 갑자기 어떤 얼굴이 온 몸속에 떠오른다.